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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취명(南就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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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량(季良)
호(號)약파(藥坡)
생년1661(현종 2)
졸년1741(영조 17)
시대조선중기
본관의령(宜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남상훈(南尙熏)
조부남선(南翧)
외조부이행원(李行源)

[상세내용]

남취명(南就明)
1661년(현종 2)∼1741년(영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계량(季良), 호는 약파(藥坡).

조부는 감사(監司) 남선(南翧)이고, 부친은 남상훈(南尙熏)이며, 모친은 교리를 지낸 이행원(李行源)의 딸이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거쳐 홍문관에 들어갔다.

1704년(숙종 30) 수찬으로 있으면서, 조정에서 박세당(朴世堂)이 지은 『사변록(思辨錄)』을 모두 불태워버리려 하자 그것의 옳지 못함을 극력 상소하였고, 이듬해에는 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尙運)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왕의 신임이 두터워 오랫동안 승지로 재임하였고, 1717년(숙종 43)에는 예조참판으로 동지부사에 발탁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2년(경종 2) 왕이 노론(老論) 4대신의 사사(賜死)를 감형하려 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그 불가함을 동료들과 함께 역설하였으며, 그뒤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소론의 거두 김일경(金一鏡)을 변명하는 한편, 노론의 축출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집권하자 한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으나, 1727년(영조 3)에 다시 서용되어 경기도관찰사병조참판을 거쳐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영조조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우인수(禹仁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