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순(朴泰淳)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D0DCC21CB1653X0 |
자(字) | 여후(汝厚) |
호(號) | 동계(東溪) |
생년 | 1653(효종 4) |
졸년 | 1704(숙종 30)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반남(潘南)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박세상(朴世相) |
조부 | 박황(朴潢) |
저서 | 『동계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태순(朴泰淳)
1653년(효종 4)∼1704년(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후(汝厚), 호는 동계(東溪).
대사헌 박황(朴潢)의 손자이며, 광흥창수(廣興倉守) 박세상(朴世相)의 아들이다.
1682년(숙종 8) 생원이 되고, 1684년 황감과(黃柑科)에서 장원급제하였으며, 168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持平)을 거쳐, 1689년 홍문관에 등용되고, 2년 뒤 문학(文學)이 되었다.
1691년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내고, 이듬해 경주부윤(慶州府尹), 1695년 이후 광주부윤(廣州府尹)‧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98년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재직중에, 허균(許筠)의 문집을 간행한 데 대한 전라도 유생들의 규탄으로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좌천되었다가 1703년(숙종 29) 복직,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95년 11월 광주부윤(廣州府尹) 재직시 성중에 있는 백제 시조 왕묘(王廟)의 묘정이 황폐되고, 그 담과 벽이 퇴락하였음을 보고 임금에게 건의하여 수명의 노비를 두어 이를 소제하게 하고, 군관(軍官)들로 하여금 이를 교대로 지키도록 하게 한 일이 있다.
저서로는 『동계집』 6권이 있다.
대사헌 박황(朴潢)의 손자이며, 광흥창수(廣興倉守) 박세상(朴世相)의 아들이다.
1682년(숙종 8) 생원이 되고, 1684년 황감과(黃柑科)에서 장원급제하였으며, 168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持平)을 거쳐, 1689년 홍문관에 등용되고, 2년 뒤 문학(文學)이 되었다.
1691년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내고, 이듬해 경주부윤(慶州府尹), 1695년 이후 광주부윤(廣州府尹)‧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98년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재직중에, 허균(許筠)의 문집을 간행한 데 대한 전라도 유생들의 규탄으로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좌천되었다가 1703년(숙종 29) 복직,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95년 11월 광주부윤(廣州府尹) 재직시 성중에 있는 백제 시조 왕묘(王廟)의 묘정이 황폐되고, 그 담과 벽이 퇴락하였음을 보고 임금에게 건의하여 수명의 노비를 두어 이를 소제하게 하고, 군관(軍官)들로 하여금 이를 교대로 지키도록 하게 한 일이 있다.
저서로는 『동계집』 6권이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增補文獻備考
國朝榜目
增補文獻備考
[집필자]
김능하(金綾夏)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