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두악(李斗岳)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B450C545B1644X0
자(字)계첨(季瞻)
생년1644(인조 22)
졸년1687(숙종 13)
시대조선중기
본관용인(龍仁)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후산(李後山)
외조부김수현(金壽賢)

[상세내용]

이두악(李斗岳)
1644년(인조 22)∼1687년(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계첨(季瞻). 형조참판 이후산(李後山)의 아들이며, 모친은 참찬 김수현(金壽賢)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높은 학덕으로 인하여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그뒤 연이어 친상을 당하여 시묘를 극진히 하다 병을 얻어, 오랫동안 외가인 부여에 우거하다가 문음(門蔭)으로 입사(入仕)하여 효릉참봉(孝陵參奉)이 되었다.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곧 문한관(文翰官)이 되어 『현종개수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다음해에 국장감조관(國葬監造官)으로 활약하여 전적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예조병조 좌랑을 거쳐 1684년 사헌부지평이 되어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지평으로 재기용되어 휼민(恤民)‧둔전(屯田)‧수령전최(守令殿最)에 따른 문제점의 개선책을 연이어 상소하여 왕의 칭찬을 받았다.

그뒤 성균관직강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어 당시의 재상들의 불법을 논하다가 일시 파면되기도 하였다. 비변사낭청을 거쳐 1686년 평강현령이 되어 혜정(惠政)을 베풀었으나, 병을 얻어 사직하고 귀향, 다음해에 죽었다.

평소 학문을 좋아하여 늘 『통감강목(通鑑綱目)』『논어』주자(朱子)의 저술을 깊이 탐독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