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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해(權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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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개옥(皆玉)
호(號)남곡(南谷)
생년1639(인조 17)
졸년1704(숙종 30)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권대재(權大載)
저서『노론주해(魯論註解)』
저서『사범삼십오편(士範三十五編)』
저서『의경변의(義經辨疑)』
저서『남곡집(南谷集)』

[상세내용]

권해(權瑎)
1639년(인조 17)∼1704년(숙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개옥(皆玉), 호는 남곡(南谷).

부친은 호조판서 권대재(權大載)이다.

1665년(현종 6)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부정자로 처음 벼슬길에 오른 뒤, 1674년 고부사(告訃使)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같은해 정언이 되었고, 1675년 경상도 암행어사로 다녀와 문경현감 정문용(鄭文瑢), 청도군수 권일(權佾), 금산군수 윤이익(尹以益) 등 선치수령(善治守令)에게 표리(表裏: 恩賜나 헌상하는 옷감)를 하사할 것을 진언하였다.

같은해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며 지평헌납을 역임하였고, 선비 황식(黃瑎)이 상소를 올려 7현(賢)을 추천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들어갔다.

1676년 9월 현종의 묘정배향을 변경하는 논의에서 집의로서의 처신을 훌륭히 해냈다.

1679년 판중추부사 허목(許穆)영의정 허적(許積)의 아들 허견(許堅)의 불법한 행위를 공격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청남(淸南)‧탁남(濁南)의 당파싸움이 벌어지자 도승지 민암(閔黯)에 의하여 청남인 허목의 당으로 몰려 부친은 광주로, 그는 청도로 귀양갔으며, 이듬해 창성으로 이배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대사간에 복관되어 대사성강화유수대사헌부제학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다시 대사헌형조참의를 거쳐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1694년 갑술환국 때 창성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697년에 석방되어 예안에서 여생을 보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평양부윤으로 재임할 때는 평안북도 영변보현사 영암대사석종비(靈巖大師石鐘碑)의 비문을 짓고 썼다.

저서로는 『노론주해(魯論註解)』『사범삼십오편(士範三十五編)』『의경변의(義經辨疑)』『남곡집(南谷集)』 등이 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星湖文集
燃藜室記述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이원근(李元根)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