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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도(朴元度)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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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헌(仲憲)
호(號)용탄산인(龍灘散人)
생년1626(인조 4)
졸년1690(숙종 16)
시대조선중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욱(朴戫)

[상세내용]

박원도(朴元度)
1626년(인조 4)∼1690년(숙종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헌(仲憲), 호는 죽창(竹窓)용탄산인(龍灘散人). 진사 박욱(朴戫)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3년(현종 4) 식년시에 갑과로 급제,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제수받고 의금부도사감찰공조좌랑을 거쳐, 1666년에 청안현감(淸安縣監)을 지냈다.

1672년 전적병조정랑을 거쳐 1673년 지평에 이어 정언이 되면서부터 지평 네 차례, 정언 세 차례를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남인에 의하여 곤경에 빠진 송시열(宋時烈)을 변호하다가 죄를 얻어 청주도사(淸州都事)로 좌천되고, 뒤에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옮겼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승진하여 지평병조정랑사헌부장령을 지내고 1683년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곳을 할읍(割邑)하여 새로이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하려고 백성으로부터의 역역(力役)을 빈번히 징발하였는데, 이때 마포(麻布) 3,000필로써 고마(雇馬)하여 백성의 부담을 크게 완화시켰다.

1684년 장례원판결사, 그뒤 형조참의우부승지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거쳐, 자청하여 부평현감으로 나아갔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면서 독서로 생애를 마쳤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권인혁(權仁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