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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운(權大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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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시회(時會)
호(號)석담(石潭)
생년1612(광해군 4)
졸년1699(숙종 25)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권근중(權謹中)
조부권협(權悏)

[상세내용]

권대운(權大運)
1612년(광해군 4)∼1699년(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시회(時會), 호는 석담(石潭).

조부는 예조판서 권협(權悏)이며, 부친은 사어(司禦) 권근중(權謹中)이다.

1642년(인조 20)에 진사가 되고, 1649년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이후 지평(持平)헌납(獻納)이조정랑응교사간 등의 청요직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이후 형조병조예조참의좌승지한성부우윤형조참판개성유수 등을 거쳐 1666년(현종 7)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70년에는 호조판서로 발탁되었으며, 그뒤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고 판의금부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1674년에 숙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서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하게 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밀려났다가 파직당하고 영일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뒤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 그는 유배중인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사사하도록 하였다. 이어 치사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러나 1694년에 남인이 숙종의 폐비인 민씨(閔氏)의 복위운동을 일으킨 소론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폐비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의 미움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는 갑술환국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80세가 넘는 고령이라 하여 풀려나 귀향하게 되었다.

과격파 남인으로 당쟁에 휘말렸으나 생활이 검소하고 청렴하여 명망이 높았는데, 죽고 난 뒤 왕의 특명으로 직첩이 환급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樊巖集(蔡濟恭)
國朝榜目

[집필자]

신해순(申解淳)

명 : "대운(大運)"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26權大載安東人進士偉中子大運従弟光海己未生字仲車號敦艮齋又蘇川又龍門仁祖乙酉生進俱中孝宗癸巳登别試丙申以承文正字登重試歴提學入衡
紀年便攷v28肅宗乙卯入相至領賜几杖入者社己巳廢母時以首相半日庭請而罷終無一言匡正宋時烈之就拿也中路病重有徑卒之憲大運奏曰時烈罪逆彰著不必待鞫問請即為賜死従之甲戌被竄蒙放己卯卒年八十七自上特為復爵孫重經見下子珪字徳章
紀年便攷v28權重經大運孫瑋子字道一號靜黙堂又巽齋肅宗己巳登増廣選湖堂歴翰林銓郞官止大司憲辛巳獄出於閔彥良之招屡次受刑减死絶
紀年便攷v28子進士同年登文科歷東伯開留沁留官止判尹肅宗己巳廢妃時以正使赴燕厚載問於時相權大運曰彼必問實状何以荅之大運曰既膺使命自有裁量何須問為問於親査睦来善来善曰宜以自絶于天䓁語直陳無隠也厚載到京清帝果以閣老問其實状
國朝捷錄v01道一靜默堂瑋子大運孫吏議又號巽齋
郯述v03大運從弟七十
國朝人物志v3悏孫仁祖壬午進士己丑文科歷校理肅宗乙卯拜右相至領議政入耆社賜几杖己巳廢妃大運以首相不匡甲戌臺劾削奪卒年八十八國朝榜目孫重經字道一號靜默堂生員文科
國朝人物志v3國朝榜目初登科論議甚好權大運死後世子以曾經師傅將遣宮官致弔大成上疏以爲大運是己巳半日廷請者於春宮義不當致弔金公昌直奬許以朝陽鳳鳴後因其疏中有庚申甚於甲寅己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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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