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영(曺漢英)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D55CC601B1608X0 |
자(字) | 수이(守而) |
호(號) | 회곡(晦谷) |
시호(諡號) | 문충(文忠) |
생년 | 1608(선조 41) |
졸년 | 1670(현종 11)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창녕(昌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문수(曺文秀)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한영(曺漢英)
1608년(선조 41)∼1670년(현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수이(守而), 호는 회곡(晦谷). 공조참판 조문수(曺文秀)의 아들이다. 이식(李植)‧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7년(인조 5)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이 되고, 1637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39년 지평이 되고, 그 이듬해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수륙군(水陸軍)의 원병을 청하는 동시에 원손을 볼모로 심양(瀋陽)에 보내라고 요청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이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져 척화파(斥和派)인 김상헌(金尙憲)‧채이항(蔡以恒) 등과 함께 1641년 심양으로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으나 굽히지 않았으며, 옥중에서도 김상헌의 시문집인 『설교집(雪窖集)』의 편찬을 도왔다.
1642년 심양에서 의주 감옥으로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1645년 지제교‧헌납을 역임하고 지평이 되었을 때 강빈사건(姜嬪事件)에 반대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빛을 보지 못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1650년(효종 1) 부수찬이 되고 이어 헌납이 되어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으며, 교리가 되어 조귀인(趙貴人)의 소생인 숭선군(崇善君) 징(澂)‧낙선군(樂善君) 축(潚) 등에 대한 대우를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고,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간에 임명되었으며, 집의로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당상관에 승서되었다.
1654년 승지, 1656년 대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성‧이조참의‧승지를 역임하고 다시 대사성이 된 이듬해 「감고신성잠(鑑古愼成箴)」 180구를 지어 효종으로부터 표피(豹皮)를 하사받았다.
이후 대사간이 되고 여러 차례 이조참의를 지내면서 남인인 윤휴(尹鑴)의 등용을 적극 반대하다가 면직된 일도 있었다. 현종이 즉위한 1659년에는 찬집청당상(撰集廳堂上)으로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호조참의‧예조참의를 역임하고 다시 호조참의가 되었을 때 김징(金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한때 벼슬을 떠났다.
1668년(현종 9) 예조참판이 되고, 이어 한성부좌윤‧형조참판으로 있다가 이듬해에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뒤 예조참판을 지내고 한성부우윤에 임명되는 동시에 하흥군(夏興君)에 봉하여졌으나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상녀취첩(喪女娶妾)하였다는 이유로 이옥(李沃) 등의 탄핵을 받았다. 문장이 뛰어나 문집으로 『회곡집』이 있고, 시조 2수가 전한다.
여주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27년(인조 5)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이 되고, 1637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39년 지평이 되고, 그 이듬해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수륙군(水陸軍)의 원병을 청하는 동시에 원손을 볼모로 심양(瀋陽)에 보내라고 요청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이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져 척화파(斥和派)인 김상헌(金尙憲)‧채이항(蔡以恒) 등과 함께 1641년 심양으로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으나 굽히지 않았으며, 옥중에서도 김상헌의 시문집인 『설교집(雪窖集)』의 편찬을 도왔다.
1642년 심양에서 의주 감옥으로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1645년 지제교‧헌납을 역임하고 지평이 되었을 때 강빈사건(姜嬪事件)에 반대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빛을 보지 못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1650년(효종 1) 부수찬이 되고 이어 헌납이 되어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으며, 교리가 되어 조귀인(趙貴人)의 소생인 숭선군(崇善君) 징(澂)‧낙선군(樂善君) 축(潚) 등에 대한 대우를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고,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간에 임명되었으며, 집의로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당상관에 승서되었다.
1654년 승지, 1656년 대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성‧이조참의‧승지를 역임하고 다시 대사성이 된 이듬해 「감고신성잠(鑑古愼成箴)」 180구를 지어 효종으로부터 표피(豹皮)를 하사받았다.
이후 대사간이 되고 여러 차례 이조참의를 지내면서 남인인 윤휴(尹鑴)의 등용을 적극 반대하다가 면직된 일도 있었다. 현종이 즉위한 1659년에는 찬집청당상(撰集廳堂上)으로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호조참의‧예조참의를 역임하고 다시 호조참의가 되었을 때 김징(金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한때 벼슬을 떠났다.
1668년(현종 9) 예조참판이 되고, 이어 한성부좌윤‧형조참판으로 있다가 이듬해에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뒤 예조참판을 지내고 한성부우윤에 임명되는 동시에 하흥군(夏興君)에 봉하여졌으나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상녀취첩(喪女娶妾)하였다는 이유로 이옥(李沃) 등의 탄핵을 받았다. 문장이 뛰어나 문집으로 『회곡집』이 있고, 시조 2수가 전한다.
여주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孝宗實錄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명 : "한영(漢英)"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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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