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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비경(尹飛卿)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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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충거(冲擧)
시호(諡號)소정(昭靖)
생년1607(선조 40)
졸년1680(숙종 6)
시대조선중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유건(尹惟健)
조부윤홍립(尹弘立)
증조부윤인함(尹仁涵)
고조부윤응규(尹應奎)

[상세내용]

윤비경(尹飛卿)
1607년(선조 40)∼1680년(숙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충거(冲擧).

고조부는 첨정 윤응규(尹應奎), 증조부는 형조참판 윤인함(尹仁涵), 조부는 전적 윤홍립(尹弘立), 부친은 윤유건(尹惟健)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후에 참판 이민구(李敏求)의 문인이 되었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 재임(齋任)이 되었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전적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 이후 벼슬이 대개 양사 사이에 거의 머물렀는데, 각 아문의 둔전과 여러 궁가(宮家)의 절수(折受)를 파할 것을 요청하였다.

1660년(현종 1) 장령으로 있을 때 효종 사후 대왕대비의 복제문제를 놓고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1년설과 윤선도(尹善道) 등 남인의 3년설이 대립하였을 때 윤선도의 상소를 예론에 거짓으로 의탁한 흉계라고 극론하며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그뒤 효종대왕 부묘(祔廟) 때에 독축관(讀祝官)이 된 예에 따라서 당상관에 오르고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그 직을 사양하고 지방관으로 나갔다. 통진현감으로 있으면서는 양전(量田)을 하는 데나 부역을 부과하는 데도 백성들의 편한 것을 따라 실정대로 하였다.

1667년 우승지가 되고 병조참의공조참의가 되었다. 이어서 경주부윤회양부사에 제수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추방되고 숙종이 회맹(會盟)할 적에 그가 인함의 적장손이라 하여 호조참판에 제수되어 가선대부에 오르고 파원군(坡原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양수(金良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5-19처 한산이씨 정려문를 참고하여 군호를 파평군(坡平君)에서 파원군(坡原君)으로 수정함. 시호 소정(昭靖)은 선조인 윤곤(尹坤)의 시호이므로 삭제함. 문과방목에도 파원군으로 나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