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추(元斗樞)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6D0B450CD94B1604X0 |
자(字) | 자중(子中) |
생년 | 1604(선조 37) |
졸년 | 1663(현종 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원주(原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원유남(元裕男) |
[관련정보]
[상세내용]
원두추(元斗樞)
1604년(선조 37)∼1663년(현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중(子中).
부친은 원유남(元裕男)이다. 형 원두표(元斗杓)와 함께 산림(山林)인 박지계(朴知誡)에게 수업하였다.
1623년(인조 1) 아버지와 형을 따라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에 책봉될 수 있었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았으며, 그 공으로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미숙하다 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이후 더욱 성리학에 침잠하는 한편, 이의길(李義吉)‧김극형(金克亨) 등과 교유관계를 맺었다.
1628년 송광유(宋光裕)의 고변으로 체포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무사하였다.
그뒤 진잠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병자호란에서 항복한 이후로는 출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원주와 여주 사이에 집을 짓고 오경과 『근사록』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뒤 친우의 권유로 출사하여 익위사사어‧공조정랑‧사도시정‧의성현감‧선산부사‧충주목사‧광주부윤(廣州府尹) 등을 지냈다. 충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곡식을 많이 축적하여 기근을 이기는 데 공을 세웠다.
성리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으나, 학문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 그것을 아는 이는 조익(趙翼)‧장유(張維) 등이었다.
부친은 원유남(元裕男)이다. 형 원두표(元斗杓)와 함께 산림(山林)인 박지계(朴知誡)에게 수업하였다.
1623년(인조 1) 아버지와 형을 따라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에 책봉될 수 있었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았으며, 그 공으로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미숙하다 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이후 더욱 성리학에 침잠하는 한편, 이의길(李義吉)‧김극형(金克亨) 등과 교유관계를 맺었다.
1628년 송광유(宋光裕)의 고변으로 체포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무사하였다.
그뒤 진잠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병자호란에서 항복한 이후로는 출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원주와 여주 사이에 집을 짓고 오경과 『근사록』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뒤 친우의 권유로 출사하여 익위사사어‧공조정랑‧사도시정‧의성현감‧선산부사‧충주목사‧광주부윤(廣州府尹) 등을 지냈다. 충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곡식을 많이 축적하여 기근을 이기는 데 공을 세웠다.
성리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으나, 학문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 그것을 아는 이는 조익(趙翼)‧장유(張維) 등이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용곤(金鎔坤)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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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