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만(李時萬)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2DCB9CCB1601X0 |
자(字) | 석여(錫汝) |
생년 | 1601(선조 34) |
졸년 | 1672(현종 13)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양휴(李揚休)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시만(李時萬)
1601년(선조 34)∼1672년(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석여(錫汝). 세종의 서자 영해군(寧海君) 이당(李塘)의 7대손으로, 이양휴(李揚休)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를 거쳐 163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정자‧예문관검열 등을 거쳐 승정원주서로 옮겼다. 뒤이어 병조‧예조의 좌랑과 시강원사서를 역임하여 삼사의 요직 등을 맡았다.
1647년 의정부사인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병조참지‧우부승지를 거쳐 1650년(효종 1)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김자점(金自點)의 일당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1660년(현종 1) 상주목사로 복직되었다가 또 다시 김자점문제로 파직되었다.
그뒤 철원부사를 지내다가 수어사(守禦使) 김좌명(金佐明)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는데, 김좌명의 청죄(請罪)로 1668년에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려났다.
1624년(인조 2) 사마시를 거쳐 163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정자‧예문관검열 등을 거쳐 승정원주서로 옮겼다. 뒤이어 병조‧예조의 좌랑과 시강원사서를 역임하여 삼사의 요직 등을 맡았다.
1647년 의정부사인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병조참지‧우부승지를 거쳐 1650년(효종 1)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김자점(金自點)의 일당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1660년(현종 1) 상주목사로 복직되었다가 또 다시 김자점문제로 파직되었다.
그뒤 철원부사를 지내다가 수어사(守禦使) 김좌명(金佐明)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는데, 김좌명의 청죄(請罪)로 1668년에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려났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집필자]
홍순만(洪淳晩)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