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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겸(尹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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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옥(汝玉)
호(號)오옹(梧翁)
생년1601(선조 34)
졸년1665(현종 6)
시대조선중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경승(尹慶承)
조부윤정(尹渟)

[상세내용]

윤겸(尹㻩)
1601년(선조 34)∼1665년(현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옥(汝玉), 호는 오옹(梧翁).

이조정랑 윤정(尹渟)의 손자이며, 판관 윤경승(尹慶承)의 아들이다. 어려서 영리하여 신동이라 불렸으며, 20세 전에 이미 시(詩)‧표(表)에 능하여 붓을 들면 저절로 문장을 이루었다.

1627년(인조 5)에 둘째형 윤성(尹珹)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병조정랑을 거쳐 사복시(司僕寺)봉상시(奉常寺)장악원(掌樂院)종부시(宗簿寺)정(正)을 지낸 뒤 정언헌납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그뒤 세자시강원문학필선직강사예를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무장옹진배천남양이천평산 등의 수령 및 강원도도사를 역임하였다.

대각(臺閣)에 있을 때는 직언을 잘 하였고, 지방관으로서 군현을 다스림에 송사(訟事)를 공정하게 처리하여 가는 곳마다 선정을 하였다.

젊었을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명성을 듣고 한번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 못된다.”고 하였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가 선견이 밝음에 탄복하였다.

천성이 강직하여 옳지 않다고 여긴 일은 상대가 고관이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만년에 신흥세도가들에게 부앙하기를 꺼려 출입을 끊고,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는 것으로 낙을 삼다가 일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明谷集

[집필자]

최호균(崔豪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