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선(睦性善)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AA9C131C120B1597X0 |
자(字) | 성지(性之) |
호(號) | 병산(甁山) |
생년 | 1597(선조 30) |
졸년 | 1647(인조 2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사천(泗川)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목장흠(睦長欽) |
[상세내용]
목성선(睦性善)
1597년(선조 30)∼1647년(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성지(性之), 호는 병산(甁山).
부친은 목장흠(睦長欽)이다.
1624년(인조 2) 유학(幼學)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5년 검열(檢閱)이 되어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문제로 찬축(竄逐)되어 있던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죄가 없다는 소를 올려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뒤 봉교(奉敎)‧정언(正言)을 지냈으나 앞의 상소문제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계속 받아 체직되었다.
1629년에 예조정랑이 되었으나 대간들의 계속된 탄핵으로 중앙에서 밀려나 죽산현감(竹山縣監)으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치적을 쌓아 1634년 경기암행어사로부터 훌륭한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뒤 1638년 다시 부교리를 거쳐 집의(執義)‧교리‧우승지‧동부승지‧좌승지‧전라감사‧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47년 전라감사로 있었을 때 치적을 인정받았던 그는 남쪽지방이 불안하여지자 경상도감사로 제수되어 그곳에 도착한 뒤 곧 죽었다.
그가 인성군 이공을 두호한 것은 파당을 초월한 것으로서, 단지 왕의 처사를 올바르게 하기 위한 직언이었다는 것이 인조에게 평가되어, 대간들의 많은 논핵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무난하게 관계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능력과 기량을 갖춘 재능있는 관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부친은 목장흠(睦長欽)이다.
1624년(인조 2) 유학(幼學)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5년 검열(檢閱)이 되어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문제로 찬축(竄逐)되어 있던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죄가 없다는 소를 올려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뒤 봉교(奉敎)‧정언(正言)을 지냈으나 앞의 상소문제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계속 받아 체직되었다.
1629년에 예조정랑이 되었으나 대간들의 계속된 탄핵으로 중앙에서 밀려나 죽산현감(竹山縣監)으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치적을 쌓아 1634년 경기암행어사로부터 훌륭한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뒤 1638년 다시 부교리를 거쳐 집의(執義)‧교리‧우승지‧동부승지‧좌승지‧전라감사‧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47년 전라감사로 있었을 때 치적을 인정받았던 그는 남쪽지방이 불안하여지자 경상도감사로 제수되어 그곳에 도착한 뒤 곧 죽었다.
그가 인성군 이공을 두호한 것은 파당을 초월한 것으로서, 단지 왕의 처사를 올바르게 하기 위한 직언이었다는 것이 인조에게 평가되어, 대간들의 많은 논핵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무난하게 관계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능력과 기량을 갖춘 재능있는 관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榜目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명 : "성선(性善)"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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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