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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姜瑜)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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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헌(公獻)
호(號)상곡(商谷)
시호(諡號)충선(忠宣)
생년1597(선조 30)
졸년1668(현종 9)
시대조선중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강천민(姜天民)
출신지제천
저서『상곡집』

[상세내용]

강유(姜瑜)
1597년(선조 30)∼1668년(현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공헌(公獻), 호는 상곡(商谷). 제천 출신.

부친은 강천민(姜天民)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었다. 이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는 등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과거에 뜻을 버리고 10년 동안 고향에 칩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 과거에 응시하여 이듬해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예빈시직장으로 임금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들어가 화의를 반대하고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도망자들을 돌려보내 달라는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주고 화의를 할 것을 주장하는 이귀(李貴) 등의 의견을 배척할 것을 상소하였다.

1639년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병조좌랑이 되었고, 1642년에 지평이 되었으며, 1651년(효종 2)에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 이어 조정에서 문무를 겸한 장재(將才)로 천거하여 1653년 함경남도병사에 임명되었다. 성벽수축과 병사의 훈련을 잘하여 왕이 좋은 말을 내려 그 업적을 극찬하고, 이듬해 북병마사를 제수하였다.

1656년 승지를 거쳐 황해감사경기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충청감사를 역임하였다.

1659년 동지부사청나라에 가서 왕의 북벌의 뜻을 받들어 적의 허실을 살피고 왔다. 그러나 이해 왕이 죽자 황해감사로서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함을 크게 통곡하였다.

1661년(현종 2) 수원부사로서 가자(加資)되었으며, 1663년 우부승지좌부승지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강릉부사에 이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상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商谷集
貞菴集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