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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갑(羅萬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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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몽뢰(夢賚)
호(號)구포(鷗浦)
생년1592(선조 25)
졸년1642(인조 20)
시대조선중기
본관안정(安定)
활동분야문신 > 문신
나급(羅級)
처부정엽(鄭曄)
출신지나주
저서『병자록(丙子錄)』
저서『구포집』

[상세내용]

나만갑(羅萬甲)
1592년(선조 25)∼1642년(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몽뢰(夢賚), 호는 구포(鷗浦). 나주 출신.

부친은 세자시강원보덕 나급(羅級)이며, 정엽(鄭曄)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권세에 아부하는 원생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유폐사건(西宮幽閉事件)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귀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되고 통덕랑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수찬이 되었다.

1625년 교리가 되었을 때 서인(西人)인 김류(金瑬)가 북인(北人)인 남이공(南以恭)을 등용하자 소서(少西)로서 이를 반대하다가 강동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이귀(李貴)의 도움으로 강등된 관직을 되찾게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사관이 되어 왕을 따라 강화도에 가서 풍기(風紀)를 바르게 하고 도민을 서로 경계하게 하여 범죄를 엄하게 다스렸다.

이듬해 환도하여 병조정랑수찬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포로문제가 일어나 김류 등의 탄핵을 받고 귀양가게 되었다.

그뒤 1631년 부수찬헌납이 되었으며, 1634년 홍주목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참의에 올랐으나 시폐(時弊)에 대한 상소를 하다가 파직당하고 고향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단신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모시고 공조참의병조참지로서 관향사(管餉使)가 되어 군량공급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강화 후 무고를 받아 영해로 귀양갔다가 1639년 풀려나와 영천(榮川: 지금의 榮州)에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병자록(丙子錄)』『구포집』이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홍순창(洪淳昶)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