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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웅(李命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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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정이(珽而)
호(號)송사(松沙)
생년1590(선조 23)
졸년1642(인조 20)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유징(李幼澄)
조부이성중(李誠中)
외조부조확(趙擴)

[상세내용]

이명웅(李命雄)
1590년(선조 23)∼1642년(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이(珽而), 호는 송사(松沙). 완창부원군(完昌府院君) 이성중(李誠中)의 손자로, 완흥군(完興君) 이유징(李幼澄)의 아들이며, 모친은 예문관검열 조확(趙擴)의 딸이다.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훈도를 받았다. 성품이 굳세고 절개가 있었으며, 여러 서책을 널리 읽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다.

광해군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가두는 등 인륜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을 보고 개탄하면서, 숨어서 밭을 갈아 어머니를 봉양하며 지냈다.

1626년(인조 4)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가 동궁세마(東宮洗馬)가 되고, 시직(侍直)에 전임, 이해 9월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정언을 거쳐 고성현령으로 나갔다가 수찬지제교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등을 역임하였다.

1631년에는 평안도순찰사로 나가 성첩(城堞)을 수축하고, 군량을 저장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고 돌아와서 국경지대의 정형을 자세히 보고하여 국방대책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듬해에는 인조의 사친(私親) 원종(元宗)을 추숭(追崇)하는 일에 반대하여 삭직되었다가 다시 수찬으로 기용되어 헌납이조정랑무장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지평으로 대청강경책(對淸强硬策)을 진언하고, 그해 겨울에 호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 남한산성에 호종(扈從), 성하의 양곡을 실어들여 전수책(戰守策)을 확립하고 주화인(主和人)들을 베어 군심을 격려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에는 자청하여 세자를 따라 청나라로 가서 보좌, 주선한 공이 컸다. 돌아와서 대사간부제학경상도관찰사예조참의를 지내고, 홍주목사로 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완양군(完陽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김용국(金龍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