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준(吳竣)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624C900FFFFB1587X0 |
자(字) | 여완(汝完) |
호(號) | 죽남(竹南) |
생년 | 1587(선조 20) |
졸년 | 1666(현종 7)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동복(同福)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오백령(吳百齡) |
저서 | 『죽남당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오준(吳竣)
1587년(선조 20)∼1666년(현종 7). 조선 후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竹南). 이조참판 오백령(吳百齡)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주서를 거쳐 지평‧장령‧필선‧수찬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뒤인 1639년(인조 17) 한성부판윤으로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그뒤 1643년 청나라 세조의 즉위에 즈음하여 등극부사(登極副使)로, 1648년에는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0년(효종 1)에 예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형조판서‧대사헌‧우빈객(右賓客) 등을 거쳐 1660년(현종 1) 좌참찬이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왕가의 길흉책문(吉凶冊文)과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공사(公私)의 비명을 썼다.
특히 그의 글씨는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따라 단아한 모양의 해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죽남당집』이 있으며, 글씨로 아산의 충무공이순신비(忠武公李舜臣碑), 구례의 화엄사벽암대사비(華嚴寺碧巖大師碑), 회양(淮陽)의 허백당명조대사비(虛白堂明照大師碑)‧이판이현영묘비(吏判李顯英墓碑), 광주(光州)의 의창군광묘비(義昌君珖墓碑), 일본 닛코사(日光寺)의 닛코산조선등로명(日光山朝鮮燈爐銘), 안성(安城)의 대동균역만세불망비(大同均役萬世不忘碑), 죽산(竹山) 칠장사(七長寺)의 벽응대사비(碧應大師碑) 등의 비문이 있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주서를 거쳐 지평‧장령‧필선‧수찬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뒤인 1639년(인조 17) 한성부판윤으로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그뒤 1643년 청나라 세조의 즉위에 즈음하여 등극부사(登極副使)로, 1648년에는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0년(효종 1)에 예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형조판서‧대사헌‧우빈객(右賓客) 등을 거쳐 1660년(현종 1) 좌참찬이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왕가의 길흉책문(吉凶冊文)과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공사(公私)의 비명을 썼다.
특히 그의 글씨는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따라 단아한 모양의 해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죽남당집』이 있으며, 글씨로 아산의 충무공이순신비(忠武公李舜臣碑), 구례의 화엄사벽암대사비(華嚴寺碧巖大師碑), 회양(淮陽)의 허백당명조대사비(虛白堂明照大師碑)‧이판이현영묘비(吏判李顯英墓碑), 광주(光州)의 의창군광묘비(義昌君珖墓碑), 일본 닛코사(日光寺)의 닛코산조선등로명(日光山朝鮮燈爐銘), 안성(安城)의 대동균역만세불망비(大同均役萬世不忘碑), 죽산(竹山) 칠장사(七長寺)의 벽응대사비(碧應大師碑) 등의 비문이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燃藜室記述
靑城集
東溟集
朝鮮金石總覽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三田渡碑竪立始末(金聲均, 卿土서울 12, 1961)
孝宗實錄
顯宗實錄
燃藜室記述
靑城集
東溟集
朝鮮金石總覽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三田渡碑竪立始末(金聲均, 卿土서울 12, 1961)
[집필자]
정하명(鄭夏明)
호 : "죽남(竹南)"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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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