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정광경(鄭廣敬)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815AD11ACBDB1586X0
자(字)공직(公直)
호(號)추천(秋川)
생년1586(선조 19)
졸년1644(인조 22)
시대조선중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창연(鄭昌衍)

[상세내용]

정광경(鄭廣敬)
1586년(선조 19)∼1644년(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직(公直), 호는 추천(秋川). 좌의정 정창연(鄭昌衍)의 아들이며, 판서 정광성(鄭廣成)의 아우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수찬정언을 지내고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일자 이론(異論)을 내세워 반대하고 청의(淸議)를 따랐다.

그뒤 1616년 사간이 된 뒤, 상의원정(尙衣院正)사인응교전한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 대비삭호(大妃削號)를 포함한 폐모론이 재론되었을 때, 아버지 정창연이 두문불출하여 정청(庭請)에 불참, 화를 입을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를 위하여 대신 참가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사간에 임명되자, 과거의 정청참여를 자책하여 간관으로서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지적, 사퇴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괄(李适)의 난 때 형 정광성은 아버지를 모시고 그는 어가(御駕)를 호종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형이 임금을 따르고 자신이 아버지를 모심으로써 형제가 군부(君父)에 대한 충효를 함께 실천하였다 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뒤 예조참의충청도관찰사대사헌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대사간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國朝人物志

[집필자]

조원래(趙湲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