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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룡(金俊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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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수부(秀夫)
시호(諡號)충양(忠襄)
생년1586(선조 19)
졸년1642(인조 20)
시대조선중기
본관원주(原州)
활동분야무신 > 무신
김두남(金斗南)

[상세내용]

김준룡(金俊龍)
1586년(선조 19)∼1642년(인조 2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수부(秀夫).

부친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두남(金斗南)이다.

1608년(선조 41)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황해도경상도함경도병영에 근무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인동부사가 되었고,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1628년에는 황해병사가 되었으며, 북병사(北兵使)를 거쳐 1636년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관할 군사를 이끌고 적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면서 곳곳에서 군사를 모아 병력을 보강하였다.

직산(稷山)을 경유, 용인의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험준한 산세를 이용, 이를 거점으로 포진하였다. 공경(孔耿)청나라 군대 수만이 공격해오자 필사적으로 싸워 청태조의 부마 백양고라(白羊高羅) 등 많은 적병을 사살하였으나, 우리의 병력 손실도 커서 그는 휘하의 기병 수백을 이끌고 수원에 도착, 다시 남하하여 재기를 계획하였다.

감사 이시방(李時昉)은 그의 전공을 시기하여 모함하였으나, 이성구(李聖求)최명길(崔鳴吉)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되었다.

뒤에 어영중군(御營中軍)김해부사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이미지]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대표명김준룡(金俊龍)
준룡(俊龍)
성명김준룡(金俊龍)
시호충양(忠襄)
수부(秀夫)

명 : "준룡(俊龍)"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震史記略v4軍俊龍謂諸將曰矢盡粮渴明日再戰則危矣遂決歸大軍一時潰散監司李時昉聞之以兵付中軍嚴愰托以收散卒馳還公州俊龍數其畏胡不進之罪時昉與朴遾反毁於上鳴吉極言前後戰挺之功得免○十八日洪瑞鳳崔鳴吉奉國往虜營金尙憲裂書痛
震史記略v4○全羅兵使金俊龍進據光敎山殺虜將白羊高鹵獲甚多賊大至連放虎蹲砲矢石如雨而陣不動終日力戰至暮賊鳴金收軍俊龍謂諸將曰矢盡粮渴明日再戰則危矣遂決歸大軍一時潰散監司李時昉聞之以兵付中軍嚴愰托以收散卒馳還公州俊龍數
水原郡邑誌(京畿道),光武三年五月v1子之亂全羅兵使金俊龍率兵勤王至光敎山據險力戰士皆效死淸人攻之三戰三破流血漲谷淸將一人獨立高巖周視地形俊龍募銃手擊之一丸而斃淸人大哭輿尸而歸光敎之捷至今稱焉亂後義州譯官韓甫龍曰淸汗妹夫職秩如我國防禦使者死於
陽川邑誌(京畿道)v1原光敎山擊殺白羊高羅等三將白羊高羅淸之名將順治以女妻之者也是以名聞淸國時林慶業柳琳等皆從椵島錦州之役俊龍因稱病不出金馬龍俊龍之庶弟筮仕至僉知有武力選八壯士孝廟瀋陽之變陪往參寧社勳金敬文字直之號晩橋俊龍之長
陽川邑誌(京畿道)v1字子長號休谷俊龍之孫
陽川邑誌(京畿道)v1俊龍之庶弟
陽川邑誌(京畿道)v1字直之號晩橋俊龍之長子
國朝人物志v3行中路軍潰皆散去俊龍與麾下騎數百至水原欲南下更收兵監司李時昉從事朴遾毀於上俊龍當得罪大臣李聖求崔鳴吉極言戰捷狀以此得免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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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