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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계(金光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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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이지(以志)
호(號)매원(梅園)
생년1580(선조 13)
졸년1646(인조 24)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관료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진성이씨(眞城李氏)
외조부이재(李宰)

[상세내용]

김광계(金光繼)
1580년(선조 13)∼1646년(인조 24).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이지(以志), 호는 매원(梅園).

부친은 김해(金垓)이고, 모친은 진성이씨(眞城李氏)퇴계 선생의 조카인 이재(李宰)의 딸이다.

처음 대암(大菴) 박성(朴惺)에게 배우다가 안동부사로 부임한 정한강(鄭寒岡)에게 『심경(心經)』 등을 물어 학문이 크게 성취했다. 경상감사 김시양(金時讓)이 나라에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재랑(齋郞)별검(別檢)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감사(監司) 이경여(李敬輿) 같은 이도 좀처럼 남을 칭허(稱許)하지 않는 성미였지만 그를 한번 대하고는 절로 경복(敬服)하여, 일찍 여러 고을 선비들에게 『심경(心經)』『사서(四書)』를 강의하도록 도내(道內) 도훈장(都訓長)을 삼으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모든 공무를 띤 사절(使節)로 마을 부근을 지나는 인사들은 다들 그를 방문하여 예경(禮敬)을 표했다고 한다.

1627년(인조 5) 정월 정묘호란에 여헌(旅軒) 선생이 징문(徵文)을 보내어 그를 의병장(義兵將)을 삼아 막 군사를 일으켜 출진하였으나 난리가 평정되어 곧 파했으며, 1636년(인조 14) 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공은 다시 의병을 일으켜 서울을 향해 행군하여 막 기천(基川: 지금 풍기)을 지나 죽령을 넘어서다가 나라에서 항복했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북향하여 통곡하고 군사를 해산했음이 그의 일기인 『매원일기(梅園日記)』 속에 적혀 있어 후학들의 사료(史料)로 참고가 되고 있다.

그가 사망하자 대사간(大司諫)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묘지(墓誌)를 짓고 공조판서 이가환(李家煥)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매원유고(梅園遺稿)』 4책과 『매원일기(梅園日記)』가 전한다.

[참고문헌]

嶺南人物考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