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집(金集)

[요약정보]

UCIG002+AKS-KHF_12AE40C9D1FFFFB1574X0
자(字)사강(士剛)
호(號)신독재(愼獨齋)
시호(諡號)문경(文敬)
생년1574(선조 7)
졸년1656(효종 7)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학자 > 유생
김장생(金長生)
창녕조씨(昌寧曺氏)
외조부조대건(曺大乾)
출생지서울
저서『신독재문집』
저서『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

[상세내용]

김집(金集)
1574년(선조 7)∼1656년(효종 7). 조선 중기의 유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세거지는 충청도 연산(連山)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김장생(金長生)이며, 모친은 창녕조씨(昌寧曺氏)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대건(曺大乾)의 딸이다. 여덟살에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어받았다.

18세 때 진사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문장학을 좋아하지 않고 성현의 학문에 전심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을 거쳐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내고, 그뒤 전라도사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

한편,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으며, 윤선거(尹宣擧) 등과 상례를 논하고, 또 아버지가 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등, 활발한 학술활동을 폈다.

그뒤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여, 태학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하는 등 안팎으로 그 덕망을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76세 때는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의 특청을 임금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이때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80세에 좌참찬을 거쳐 81세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임금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늘 초야에 묻혀 도(道)를 즐기고,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위로 이이(李珥)의 학문을 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김장생(金長生)을 이어받아, 그 학문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 이황(李滉)을 이어받은 영남학파와 더불어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었다.

1883년(고종 20)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와 효종묘에 배향되었다. 연산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창주서원(滄州書院), 봉산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월봉서원(月峰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愼獨齋文集

[집필자]

김용걸(金容傑)

호 : "신독재(愼獨齋)"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22金集長生子兪泓壻宣祖甲戌生字士剛號愼獨齋成渾門人從宋象賢宋翼弼學纔學語時豎一指于其口曰此中字也姿稟絶異以忠信孝悌爲立身之本以窮理居敬爲學道之
國朝人物志v3字士剛號愼獨齋長生子年十八進士年三十七薦授齋郞見光海政亂奉親歸鄕里庶弟杲被人誣告事將不測集與弟
國朝人物志v3字養而咸平人莊襄公從生之後從愼獨齋金集講禮而歸肅宗朝拜副率知士禍將作遁于海西移居堤川除靑山縣監値歲大侵
國朝人物志v3仁祖甲子生員進士娶于愚伏鄭經世女經世期以遠到庚午除洗馬不就沙溪歿仍師愼獨齋金集庚子論禮被尹善道劾遂待罪南歸辛丑以參贊召入京疏論時事四月趙絅疏斥甚深遂自劾乞
國朝人物志v3使至宣擧率同志上書請斬來使以明大義丁丑後歸錦山與市南兪棨築室扁以山泉相對討論又出入愼獨齋金集之門諡文敬人物考子拯右相推掌令
國朝人物志v3字雲擧又曰叔羽牛峯人忠獻公䎘弟受業于愼獨齋金集以遺逸官至大司憲己巳因淫獄被禍東野粹言弟翊字季羽孝宗丁酉文科吏曹(參)
朝鮮科宦譜n1-6책愼獨齋逸吏判諡文敬享文廟長生 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