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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정(李昌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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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번(仲蕃)
호(號)화음(華陰)
호(號)무구옹(無求翁)
생년1573(선조 6)
졸년1625(인조 3)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주(李澍)

[상세내용]

이창정(李昌庭)
1573년(선조 6)∼1625년(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번(仲蕃), 호는 화음(華陰) 또는 무구옹(無求翁).

정언 이주(李澍)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시에 합격하여 내시교관에 발탁되어 재행(才行)이 겸비되고 학술이 정심(精深)함을 인정받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은율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정부로부터 표리(表裏)일습을 하사받았다.

1611년 행호군이 되고, 순천부사동래부사에 이어, 1617년 양주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선치수령(善治守令)으로 알려졌다. 같은해 전적사예, 이듬해 사성이 되어 대비를 폐하자는 논의에 참여하였다.

1623년(인조 1) 충청수사(忠淸水使)가 되어 문무재겸(文武才兼)의 실력을 발휘하였고, 이듬해 이괄(李括)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까지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당시 함경도관찰사 권반(權盼)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과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문제를 일으키자, 권반의 후임으로 이원익(李元翼)이귀(李貴) 등의 추천을 받아 후임으로 임명되어 명나라 군대의 노략질을 금지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625년 선위사로 안변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기다리던 중에 죽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