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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李楘)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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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문백(文伯)
호(號)송교(松郊)
시호(諡號)충정(忠正)
생년1572(선조 5)
졸년1646(인조 24)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신성(李愼誠)
저서『송교유고』

[상세내용]

이목(李楘)
1572년(선조 5)∼1646년(인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백(文伯), 호는 송교(松郊).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으로, 사옹원봉사 이신성(李愼誠)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예절을 잘 지켰으며, 13세에 어머니상을 당하여서도 의식과 예절에 게으르지 않고 어긋남이 없었다.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나가 학문을 배우고 의리를 깨달았다.

1603년(선조 36)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 정인홍(鄭仁弘) 등의 무고로 스승 성혼이 관작을 추탈당한 사실에 분개하여 1608년 성균관유생 500여인과 지방유생들과 함께 신원(伸寃)을 소청하고, 또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정인홍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하도록 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병조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1615년에 간신들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출사하여, 정언수찬교리 등을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왕을 호종(扈從)하고, 반정공신 이귀(李貴)의 패전의 죄를 탄핵하여 목베기를 청하였다.

1626년에 대사간에 승진되고, 다음해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그뒤 부제학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여, 협수사(協守使)로 성위에 올라가 지키며, 모진 풍설에도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고, 화의를 극력 배척하였다.

환도 뒤에, 윤황(尹煌) 등이 척화한 일로 유배됨을 보고 글을 올려 자핵(自劾)하고 물러났다.

학문이 깊고 지조가 있으며, 유학자 김집(金集)과 서로 친하여 모든 일을 의논해서 하였다. 뒤에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아 대사헌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등을 역임하고, 1643년에는 부제학으로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을 겸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유저(遺著)로는 『송교유고』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牛溪先生年譜
國朝人物
國朝榜目考
國朝人物志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