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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원(金弘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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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이중(而重)
호(號)해옹(海翁)
생년1571(선조 4)
졸년1645(인조 23)
시대조선중기
본관부령(扶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경순(金景順)
출생지전라북도 부안(扶安)
공신호선문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상세내용]

김홍원(金弘遠)
1571년(선조 4)∼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이중(而重), 호는 해옹(海翁)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으로,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김경순(金景順)이다.

1588년(선조 2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곡(義穀) 100여 석을 선유사(宣諭使) 윤승훈(尹承勳)를 통해, 선조(宣祖)의 행재소 용만(龍灣)으로 보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변산(邊山)에서 피난하여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 의병을 모아, 황신(黃愼)과 함께 적을 순창(淳昌)까지 추격하여 살상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에 선문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녹훈(錄勳)되고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제수(除授)되었다. 1599년에는(선조 32) 금산군수(錦山郡守)로 표창되었고, 1607년(선조 40)에는 원주목사(原州牧使)에서 탄핵받았다.

1615년(광해군 7) 나주목사(羅州牧使), 1617년(광해군 9) 담양부사(潭陽府使), 이어서 1624년(인조 2)에는 회양부사(淮陽府使)에 옮겨졌고, 1627년(인조 5)에는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되어, 금성산성(金城山城)을 지켰다.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에는 현감(縣監) 이홍발 등과 여산(礪山)에서 창의를 도모하였지만,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부안(扶安)변산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해옹(海翁)이라 칭하며 시문을 즐기다가 1645년(인조 23)에 죽었다.

『광해군일기』 및 『인조실록』 에 "문재(文才)나 무재(武才)가 없는 사람인데 오직 권세있는 사람을 아첨하여 섬겨 외람되게도 높은 품계에 올랐다"고 매우 상반되는 기록도 있다. 사후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참고문헌]

『해옹집(海翁集)』(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46-가177])
가장(최경撰), 행장(민종현撰)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집필자]

김성수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