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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빙(姜渭聘)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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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상(伯尙)
호(號)서호(西湖)
시호(諡號)충렬(忠烈)
생년1569(선조 2)
졸년1637(인조 15)
시대조선중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저서『혜국지(惠局志)』

[상세내용]

강위빙(姜渭聘)
1569년(선조 2)∼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상(伯尙), 호는 서호(西湖).

증조부는 강연(姜淵)이고, 조부는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강시(姜偲)이며, 부친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강응생(姜應生)이다. 외조부는 안동김씨(安東金氏[舊]) 김덕붕(金德鵬)이고, 처부는 연안이씨(延安李氏) 이지남(李至男)이다.

1603년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냈다. 광해군 때 여러번 내외 관직에 보직되었으나 국정이 문란함을 보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벼슬길에 나아가 익찬(翊贊)사어(司禦)를 거쳐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어(司禦)로서 뒤늦게 강화도로 가서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배종, 호위하였다.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적에게 포로가 되어 항복을 강요당하였으나 “내 목은 끊을 수 있으나 너희들 앞에 무릎은 꿇을 수 없다.” 하여 끝내 순절하였다.

1657년(효종 8) 좌승지에 추증되고, 뒤에 고향인 강화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1811년(순조 11)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강화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혜국지(惠局志)』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純祖實錄
燃藜室記述
江華志
經山集(鄭元容)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