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유홍(李惟弘)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C720D64DB1566X0
자(字)대중(大仲)
호(號)간정(艮庭)
생년1567(명종 22)
졸년1619(광해군 11)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정필(李廷弼)
저서『간정집』

[상세내용]

이유홍(李惟弘)
1567년(명종 22)∼1619년(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중(大仲), 호는 간정(艮庭).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의 후손이며, 현감 이정필(李廷弼)의 아들이다.

159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기사관으로 있을 때 선조가 군량미의 부족함을 말하자 전쟁으로 백성들이 지쳐 있으니 소생될 때까지 수령은 세금을 가볍게 하여야 민심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1597년 이후 춘추관검열예문관봉교시강원설서승정원주서를 거쳐, 정언이 되었다.

이때 양사의 탄핵을 받아 파견이 지연되고 있는 진주사(陳奏使) 유성룡(柳成龍)명나라로 급파할 것을 요청하였다.

1600년 병조좌랑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교동현감이 되었다.

1603년 평안도암행어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영천군수로 임명되었다. 경상도순검어사 유간(柳澗)은 그가 폐정을 개혁하고 문교(文敎)를 장려하며, 서리들을 엄하게 다스리고 빈민을 구휼하였다고 칭찬하였다.

1605년 죽주부사(竹州府使)로 재임하던 중 죽주산성을 견고하게 수축한 공로로 품계를 올려받았다.

1606년 병조좌랑을 거쳐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경연에 나가 『주역』을 진강하였다.

이듬해 예조참의 등이 되고, 이어 승정원부승지지제교를 겸하였다. 군신 사이에 인망이 두터웠으며, 선조에게 자신을 반성하고 하늘의 뜻에 응하여 임금된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하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당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적극 지지하며 정권을 잡고 있던 소북파의 일당이라는 탄핵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고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1820년(순조 20) 참판에 이어 정경(正卿)으로 추증되었다.

저서에 『간정집』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古鮮冊譜
黨議通略
國朝榜目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