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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설(李基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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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조(公造)
호(號)연봉(蓮峰)
생년1556(명종 11)
졸년1622(광해군 14)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지남(李至男)
정씨(鄭氏)
저서『연봉집』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기설(李基卨)
1556년(명종 11)∼1622년(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峰). 이지남(李至男)의 아들이다.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효행과 순덕(純德)으로 주부에 특제되고, 다시 청산현감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의 뜻을 거역 못하고 그해 겨울 무주현감을 거쳐 이듬해 송화현감으로 나갔다.

1591년 한성부판관이 되었고, 다음해 임진왜란의 발발로 굶주리는 백성이 많아지자 구제에 힘썼다.

이듬해 호조정랑으로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도감낭청(都監郞廳)을 겸하였으며, 해주에 있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그해 겨울 왕과 함께 환도하면서 군향(軍餉) 수급의 책임을 지고, 또한 비변사낭청까지 겸하여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2월에 덕천군수로 나갔으나 1594년 어머니 정씨(鄭氏)의 사망으로 사직하였다.

1596년 청풍군수에제수되었으나 응하지 않다가 1599년 이산해(李山海)의 강력한 추천으로 상원군수로 나갔다.

1601년 청백리에 뽑혔으며, 이듬해 연안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뒤 군자감부정사도시정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천부사예빈시부정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고, 1610년(광해군 2) 부호군 제수도 거절하였다.

그뒤 승지 등의 직을 내렸으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서인(庶人)으로 쫓겨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시국을 개탄하여 끝내 벼슬을 사양하였다. 서울 삼청동 백련봉(白蓮峰) 아래 연봉정(蓮峰亭)을 짓고 학문에 전심하여 경사‧천문‧지리‧율학‧병술 등 여러 방면에 정통하였으며, 당시 사대부의 사표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정경세(鄭經世)의 건의로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1633년 인조가 특명으로 정려를 내렸는데 그 액을 효자삼세(孝子三世)라 하였다.

저서로는 『연봉집』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