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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존성(趙存性)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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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수초(守初)
호(號)정곡(鼎谷)
시호(諡號)소민(昭敏)
생년1554(명종 9)
졸년1628(인조 6)
시대조선중기
본관양주(楊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남(趙擥)
생부조준수(趙俊秀)
조부조연손(趙連孫)

[상세내용]

조존성(趙存性)
1554년(명종 9)∼1628년(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수초(守初), 호는 용호(龍湖) 또는 정곡(鼎谷). 증판서 조연손(趙連孫)의 손자이며, 조준수(趙俊秀)의 아들로 증좌찬성 조남(趙擥)에게 입양되었다. 성혼(成渾)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이다.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더욱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으며, 특히 이항복(李恒福)신경보(辛慶普) 등과 가장 친하였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館)에 들어가서 검열이 되었으며, 이듬해 대교에 승진되었으나 모함을 입어 파면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있다가 이듬해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다시 대교에 복직되고, 이어 전적에 승진되었다.

그는 예조좌랑정언을 역임할 때 남방의 왜구들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죄없는 백성들만 괴롭힌 격이 되었으므로, 그들에 대한 회유정책을 철회하고 힘으로 물리칠 것을 강변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병부상서 석성(石星)에게 우리나라에서 명군을 철수하려는 것을 중지시키고, 또 초황(哨黃: 화약연료)수만근을 가지고 와 그 공으로 직강에 승진되었다.

1597년 어사로 군량미를 운반하였는데, 그 양이 무려 40여만섬을 넘어 군량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한다.

1601년 강화부사가 되어 1년 만에 백성들을 안정시켰고, 그뒤 호남어사충주목사단산군수를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선치하여 백성들의 환심을 샀다.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의 생모추존에 반대하여 파직당하고, 1623년 인조반정 뒤에 형조호조참판,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검찰사(檢察使)로 왕을 공주로 호종(扈從)하였으며, 난이 평정된 뒤 지의금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뒤에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가면서 분조(分朝)의 호조판서에 임명하여 세자를 따라 전주에 갔으나 돌아와서 병사하였다.

시조 4수가 『해동가요』에 전한다. 시호는 소민(昭敏)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人物志
漢陰文稿
淸選考

[집필자]

이동길(李東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