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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張潤)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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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명보(明甫)
시호(諡號)충의(忠毅)
생년1552(명종 7)
졸년1593(선조 26)
시대조선중기
본관목천(木川)
활동분야무신 > 무신
장응익(張應翼)

[상세내용]

장윤(張潤)
1552년(명종 7)∼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명보(明甫). 선전관 장응익(張應翼)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키는 팔척이며, 특히 힘이 뛰어났다. 평소 유학에 뜻을 두어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하였다. 여러번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자 활쏘기와 말타기에 전념, 1582년(선조 15) 무과에 급제하여 북도 변장을 제수받았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간호하다가 1588년에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고 훈련원정을 거쳐 사천현감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의병부장(全羅左義兵副將)이 되어 장수현에 주둔하여 적을 방어하다가 성산(星山)개령(開寧)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에 진주성을 지키는 목사 이하의 장수들이 적에 눌려 도망하려 하자 비분강개하여 군졸 200명을 휘동하여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진주성혈전의 주장이 되어 최전단에서 사병과 함께 용전하였다.

대장 황진이 적탄에 전사하니 뒤를 이어 대장이 되어 8주야를 적과 싸우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고 마침내 진주성도 함락되었다. 병조참판에 증직되고 순천정충사(旌忠祠), 진주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주명준(朱明俊)
대표명장윤(張潤)
윤(潤)
성명장윤(張潤)
시호충의(忠毅)
명보(明甫)

명 : "윤(潤)"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宣廟中興誌v3申又遣張潤迫擊毛利輝元於開寧潤一戰殺二百餘人奮被虜男子四百餘人後三日又戰殺二百人翌日輝元撤兵走入中路追擊至善山於是右路州郡悉復惟金海昌原爲賊所據後張潤以功拜泗川縣監宣廟中興誌卷之三
宣廟中興誌v3屢丹賊勢漸困初二日丁亥賊潛就開寧啓覘知之設伏於扶桑峴掩擊大敗之殺獲甚衆丙申又遣張潤迫擊毛利輝元於開寧一戰殺二百餘人奮被虜男子四百餘人後三日又戰殺二百人翌日輝元撤兵走入中路潤追擊至善山於是右路州郡悉復惟
宣廟中興誌v4殊外援不至諸將力竭而死自倭變以來陷敗之慘義烈之著無如晉城者贈千鎰慶會進左贊成宗仁兵曹判書俊民刑曹判書兵曹判書其餘贈職有差賊入城爭掠州妓美女妓有論介者故盛粧而媚之賊將悅而狎之與游矗石樓巖上論介抱賊將投岸
宣廟中興誌v4今日之戰賊尸山積可謂大捷有一賊匿樍尸中仰而放凡橫中木板跳穿進額遂死壬子晦慶會以張潤代之進以巡城將是日示中丸而死二將皆驍健善戰城中依重至是皆涕泣匈懼東城因雨頹圮群賊蟻附以登仁宗等捨方矢持短兵摶賊尸山積遂
大事編年v7時千鎰領兵三百進領七日慶會領兵五百從厚領四百領三百繼連領百餘邊士貞遣其將李潛副領三百閔汝雲領二百二十二日賊大至分陣於開慶院山腰及鄕校前路初交戰城
大事編年v7時黃進張潤中丸而死進最稱力戰爲諸將首一城依而爲重至是一時皆死恟懼
國朝人物志v2勇力絶倫壬辰以左義兵副將轉鬪星山開寧數十戰斬賊甚多時晉州諸將見賊勢益熾欲引避聞之往見金千鎰崔慶會決策入城守之忠淸兵使黃進亦來會衆推以爲大將潤爲副朝廷仍拜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