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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남(姜壽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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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수(仁叟)
시호(諡號)충렬(忠烈)
생년1552(명종 7)
졸년1592(선조 25)
시대조선중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강서(姜瑞)
생부강숙(姜璹)

[상세내용]

강수남(姜壽男)
1552년(명종 7)∼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인수(仁叟).

부친은 진사 강숙(姜璹)이다. 작은 아버지인 진사 강서(姜瑞)에 입양되었으며,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전적을 거쳐 예조병조좌랑정랑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평양이 차례로 함락되자 경기도관찰사 심대(沈岱)종사관으로 출전하였다. 그는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서 군사에 관하여 배운 일이 없었지만, 오로지 충의의 마음으로써 국가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출전하기에 앞서 가족들을 불러 이별을 고하고, 죽은 뒤에 자신의 시체라도 찾게 하려고 붉은 실을 상투에 얽어매고 옷소매에는 이름을 기록하였다.

그해 10월 군사를 움직여 한성을 탈환하려던 중 삭녕전투에서 야습을 받아 군사가 흩어졌으나 가노(家奴) 검산(檢山)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출전할 때 신표로 상투에 묶었던 붉은 실을 보고 겨우 머리만을 수습하여 장사지냈다.

뒤에 검산의 자손도 복호(復戶)되었고 선조가 제관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이조참판을 추증하였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가증(加贈)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정일(李貞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