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안민학(安敏學)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548BBFCD559B1542X0
자(字)이습(而習)
호(號)풍애(楓崖)
시호(諡號)문정(文靖)
생년1542(중종 37)
졸년1601(선조 34)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주(廣州)
활동분야학자 > 유생
안담(安曇)
출생지한성
저서『풍애집』

[상세내용]

안민학(安敏學)
1542년(중종 37)∼1601년(선조 34).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습지(習之)라고 하였다가 이습(而習)으로 고쳤다. 호는 풍애(楓崖). 찰방 안담(安曇)의 아들로서 한성에서 태어났다.

재질이 뛰어나 9세 때부터 『소학』『효경』 등을 읽기 시작하여, 20세 전후하여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 성리학 서적에 접하였다고 한다.

그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경(經)‧사(史)‧백가(百家)를 널리 섭렵하였으며, 25세에 박순(朴淳)에게 나아가 사제관계를 맺은 뒤 이이(李珥)정철(鄭澈)이지함(李之菡)성혼(成渾)고경명(高敬命) 등과 교유하였다.

1561년(명종 16)에 20세의 나이로 이미 학행(學行)이 뛰어나므로 천거를 받아 원릉참봉(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80년(선조 13)에 이이의 추천으로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

1583년에 사헌부감찰이 된 뒤, 관례에 따라 외직으로 나아가 대흥(大興)아산현풍태인 등지의 현감을 두루 거치고, 전주의 별서(別墅)에 우거하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소모사(召募使)로 임명되었다.

소모사로서 그는 전라도 광주를 중심으로 군량 수천석, 전마(戰馬) 수백필, 정예한 군사 수천인을 모아 북상하여 아산에 이르렀으나, 병을 얻어 나아가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그 병력과 군량을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에게 돌리게 하였다.

이 공로로 나중에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에 제수되었으나, 노병으로 받지 아니하고 홍주신평(新平)에 돌아가서 인사를 끊고 지내던 중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학문은 대체로 이이 계열에 속하며, 필법도 뛰어났다.

저서로 『풍애집』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大巖集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명 : "민학(敏學)"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0時輩當聽命而乃以不關之事爭辨至此置國事度外可謂逐鹿而不見泰山也上同○淳欲勸安敏學使止鄭仁弘令不更論啓敏學曰吾以德遠爲山林學者以今視之乃恠鬼輩也遂不往見○鄭澈自時輩起張世良之獄心常不平屢形於辭氣且喜飮酒醉後
靑野만集v5淳欲勸安敏學使止鄭仁弘令不更論啓敏學曰吾以德遠爲山林學者以今觀之乃怪鬼輩也遂不往見矣鄭澈自時輩起張世良之獄心常不平屢形於辭氣且喜飮酒醉後
大事編年v6儒林宗匠時輩當聽命而乃以不關之事爭辨至此置國事於度外可謂逐鹿而不見泰山淳欲勸安敏學使止鄭仁弘不更論啓敏學曰吾以德遠爲山林學者以今觀之乃怪鬼輩也遂不往見鄭澈自時輩起張世良之獄心常不平屢形於辭氣且喜飮酒醉後之
國朝人物志v1歿貧不能殮曇與尙震洪奉世等各出財乃克棺斂及葬世服其義以學行贈吏曹參判東儒師友錄子敏學見下
國朝人物志v2盡歡而罷生理蕭條日不暇給家人生業了不關心在縣棄歸必倒箱篋恐其留物平居簞瓢屢空晏如也壬辰倭寇充斥敏學間關道路經詣行在事聞除司禦留數月上疏請下兩湖募兵粟朝廷可之除召募使南下募得軍糧數千石戰馬數
國朝人物志v2敏學
國朝人物志v3字聖車廣州人參議敏學曾孫生一歲母淸州韓氏殉節于丙子虜變鞠于外氏受業于仲舅曄不勞提誨文思淹通十一歲父歿居喪如成
國朝人物志v3字孔明號德谷廣州人敏學孫以才德稱官至副司勇有二子長曰轂次曰載載字仲厚出繼伯父好逸後六七歲常侍王母側不肯出游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