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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운룡(柳雲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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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응견(應見)
호(號)겸암(謙菴)
생년1539(중종 34)
졸년1601(선조 34)
시대조선전기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중영(柳仲郢)
안동김씨(安東金氏)
외조부김광수(金光粹)

[상세내용]

유운룡(柳雲龍)
1539년(중종 34)∼1601년(선조 34).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응견(應見), 호는 겸암(謙菴).

부친은 유중영(柳仲郢)이며, 모친은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형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모든 경사(經史)를 통독함으로써 사문의 촉망을 받았다.

1572년(선조 2) 친명(親命)으로 음사(蔭仕)를 받아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가 된 뒤 이듬해 의금부도사로 추배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다시 사포서별제가 된 뒤 풍저창직장(豊儲倉直長)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철저한 임무수행능력을 인정받아 내자시주부로 승진하여, 진보현감 등을 지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병 때문에 사퇴하였다가 다시 인동현감으로 추배되었다. 길재(吉再)의 묘역을 정화하고 사우(祠宇)와 서원을 지어 유학의 진흥책을 도모하여 그를 칭송하는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광흥창주부한성부판관평시서령사복시첨정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영의정 유성룡선조에게 그를 해직시켜 어머니를 구출하도록 읍소하니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그는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모두 무사하도록 하여 모두가 그의 효심을 칭찬하였다.

그해 가을에 풍기가군수(豊基假郡守)가 되었으며, 전란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조공을 평시와 같이 함으로써 얼마 뒤 다시 정군수(正郡守)가 되어 왜적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그뒤 원주목사로 승진되었으나 어버이의 노쇠함을 핑계하여 사퇴하였다. 군국기무(軍國機務)에 관한 소를 올려 선조로부터 인정을 받아 조의(朝議)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기설이나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근거를 두고 변증을 시도하려 하였다.

저서로는 『겸암집』이 있다.

[참고문헌]


[집필자]

이순두(李純斗)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