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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曺禧)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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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경(仲慶)
자(字)경원(慶原)
생년1490(성종 21)
졸년1564(명종 19)
시대조선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숙덕(曺淑德)
조부조곤하(曹袞河)
증조부조득현(曹得賢)
출신지전라남도 담양(潭陽) 운제(雲梯)

[상세내용]

조희(曺禧)
1490년(성종 21)∼1564년(명종 19).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중경(仲慶) 또는 경원(慶原)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전라남도 담양(潭陽) 운제(雲梯) 출신이다. 운제에서 대대로 살다 부친을 따라 전라북도 순창(淳昌)으로 옮겨 살았다.

증조부는 조득현(曹得賢), 조부는 조곤하(曹袞河)이고, 부친은 조숙덕(曺淑德)이다.

1513년(중종 8)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1517년(중종 12) 정축(丁丑) 별시(別試) 병과(丙科) 6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온성판관(隱城判官)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병조정랑(兵曹正郞)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나주목사(羅州牧使)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역임한 후 동래부사(東萊府使)까지 올랐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530년(중종 25) 7월 21일자 기사에는 그는 처음 과거에 급제했을 당시 단 한 명의 노복(奴僕)도 없었으며, 농토(農土) 또한 한 이랑도 없었는데, 오래지 않아 노복도 많아지고 집도 짓고 농토 또한 많아 졌다고 되어 있다. 또 탐욕스럽고 성질이 거칠며 권력자에게 아첨하여 사람들은 그를 야비하게 여겼으나, 호남 사람이 벼슬길로 나오면 그들끼리 서로 뒤에서 후원을 해 주었기 때문에 그가 지금껏 조열(朝列)에 낄 수 있었다고 논하고 있다. 또한 1539년(중종 34) 2월 22일자 기사에는 그가 백성들에게 모질게 하여 탄핵 당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1545년(인종 1) 1월 8일 기사에도 그가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재임 중 수탈을 일삼아 지역민들의 원망을 받고 있으니 파직해 달라는 대간의 청에 인종이 파직을 윤허한 기록이 보인다.

1553년(명종 8) 2월 21일 기사에는 당시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였던 그에 대하여 남인(南人)으로 거칠고 포악하며, 무장(茂長)고부(古阜)나주(羅州)성주(星州)군수(郡守)로 재임하고 있을 때 탐욕스럽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사류(士類)에 포함시키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30일 기사에서는 일본 사신의 의심스런 행태에 대하여 대응책을 논하는 가운데, 우의정(右議政) 윤개(尹漑)가 당시 동래부사(東萊府使)였던 그에 대하여 ‘사리에 밝은 문관이며 오랑캐의 실상을 탐색하기에 적합한 지모를 가진 인물’로 추천하고 있기도 하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遣閑雜錄
朝鮮王朝實錄
CD-ROM 司馬榜目
순창군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