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홍여방(洪汝方)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D64DC5ECBC29D1438X0
자(字)자원(子圓)
호(號)연생당(戀生堂)
시호(諡號)문량(文良)
생년?(미상)
졸년1438(세종 20)
시대조선전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길민(洪吉旻)

[상세내용]

홍여방(洪汝方)
미상∼1438년(세종 2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자원(子圓), 호는 연생당(戀生堂).

판서 홍길민(洪吉旻)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원자우동시학(元子右同侍學)이 되고, 예문관검열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410년 지평이 되고, 1414년 집의가 되었다.

이듬해에 동부대언(同副代言)지형조사(知刑曹事)를 겸하였으나 판결을 잘못한 책임으로 한때 면직되었다.

이듬해 복관되어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1417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인하여 일시 사직하였다가 곧 순승부윤(順承府尹)이 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예조형조 참판으로 옮겼다.

이듬해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 되었으나, 병조아전(衙前)을 불법으로 책문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다. 처음에는 장기(長鬐)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단으로 이배되었다.

1426년에 풀려나서 인순부윤(仁順府尹)평안감사한성부윤을 거쳐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진상한 문어가 정결하지 못하다 하여 파직되었다.

1433년 복관되어 전주부윤이 되었고, 1437년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사은사명나라에 갔을 때 본국으로부터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북경에서 돌아올 때는 황제가 칙명을 내려 원유관복(遠遊冠服)을 보내주었다. 귀국 후 이조판서가 되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시와 술을 좋아하며 직언을 잘하였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