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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楊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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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466(세조 12)
시대조선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무신 > 무신
공신호정난공신(靖難功臣)
공신호좌익공신(佐翼功臣)

[상세내용]

양정(楊汀)
미상∼1466년(세조 12).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아우는 양지(楊沚)양호(楊浩)양형(楊泂)(주1)
형제
세조실록 12년(1466) 6월 12일 기사를 참고하여 아우를 추가함. "竝罷其弟沚、浩、泂等職, 其子則仍囚。"라고 적혀있다.
이 있고, 아들은 양유원(楊有源)양득원(楊得源)양계원(楊繼源)(주2)
아들
세조실록 12년(1466) 8월 3일 기사를 참고하여 아들을 추가함. “楊汀子有源、得源、繼源, 竝屬星州官奴。”라고 나온다.
이 있다.

무예가 뛰어난 무인으로서 내금위(內禁衛)의 무사로 발탁되었으나 유명하게 된 것은 단종대에 수양대군에게 발탁되면서부터였다.

당시에 수양대군은 상당한 수의 무사들을 불러모았는데, 그도 한명회(韓明澮)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이 당시의 집정대신이며 그의 반대파였던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을 때, 적극적으로 그 일에 관여한 공로로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양산군(楊山君)에 봉하여졌다.

이후 공조판서지중추원사 등 중앙의 주요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함경도평안도 등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하였다.

즉, 그는 판경성부사를 거쳐, 1461년(세조 7)에는 함길도평안도도체찰사, 1463년에는 평안도도절제사 겸 영변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오랫동안 북방의 변경지대에서만 근무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466년에 중앙에 소환되자 세조가 북방에서 오래 근무한 일로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세조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라고 진언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처형되고, 아우들은 파직되었으며, 아들들은 성주의 관노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언동이 기록된 『세조실록』에서 당시의 사관은 그가 훈구대신임에도 불구하고 변방에서만 근무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평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언동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고문헌]

端宗實錄
世祖實錄
燃藜室記述
朝野輯要

[집필자]

정두희(鄭杜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8-27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여 아우와 아들을 추가함.[수정자: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