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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귀생(安貴生)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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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활동분야미술 > 화원

[상세내용]

안귀생(安貴生)
생졸년 미상. 조선 초기의 화원(畵員).

단종조(1453∼1455)부터 세조조(1456∼1468)를 거쳐 성종조(1470∼1494)의 전반기까지 활약하였으며, 그는 최경(崔經)배련(裵連) 등과 함께 성종조의 대표적인 화원이었다.

1454년(단종 2)에 세조가 팔도급성지도(八道及城地圖)를 제작하고자 함에 산천형세(山川形勢)를 잘 아는 예조참판 정척(鄭陟), 그림을 잘 그리는 집현전직제학 강희안(姜希顔), 지도에 밝은 양성지(梁誠之), 상지(相地), 안효례(安孝禮) 등과 함께 화원으로서 삼각산(三角山) 보현봉(普賢峰)에 올라가 산의 형태와 물의 흐름을 살펴서 결정하는 등 지도 제작에 참여하였다.

또한, 1455년에는 도승지 신숙주(申叔舟)의 지시에 따라 명나라 사신들에게 금강산도(金剛山圖)를 보여주었는데, 이 작품은 그가 그렸던 것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때의 작품은 매우 우수하여 중국사신들의 찬탄을 받았다. 안귀생은 이처럼 초년에는 지도를 제작하거나 실경산수(實景山水)를 그리는 등, 산수화가로 명성을 얻고 화원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470년대의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최경배련과 함께 인물화가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1472년(성종 3)에 최경배련 등과 함께 소헌왕후(昭憲王后)세조예종의경왕의 어용(御容)을 성공적으로 제작한 바 있다. 이 공을 인정하여 성종은 그를 최경과 함께 조선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당상관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언관들의 끈질기고 세찬 반대로 인하여 이들의 당상관 승직은 취소되었다. 안귀생에 관한 기록은 1476년까지 보이는데, 이러한 기록들로 보아 안귀생은 1470년대까지 분명히 활동하였으며, 최경과 더불어 성종연간의 대표적인 초상화가였음이 확실하다. 아쉽게도 그의 작품은 전해지고 있는 것이 한 점도 없다.

[참고문헌]

端宗實錄
成宗實錄
增補文獻備考
朝鮮王朝實錄의 書畵史料(安輝濬,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朝鮮王朝時代의 畵員(安輝濬, 韓國文化 9, 1988.11.)

[집필자]

안휘준(安輝濬)
대표명안귀생(安貴生)
귀생(貴生)
성명안귀생(安貴生)

성명 : "안귀생(安貴生)"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震史記略v1三年壬辰命崔涇安貴生畵照憲王后世祖睿宗晬容奉安于璿源殿○建三聖祠於文化九月山以祀桓國桓雄檀君歲送香祝以祭從觀察李芮之
震史記略v1四年癸巳初懿敬薨世祖曰其嗣皆幼不可不傳其貌以遺之命崔涇安貴生草圖以藏之是年九月懿敬廟成奉安悴容賜畵師涇貴生爵言官論之上曰予生纔月餘乃失顧復不意今日復覩天容彷彿悲
震乘總v2年而祔頒橫看法亦合祖宗舊制從之○頒撗橫看法李克增久典戶曹減損經費賜畫工爵始立橫看人多怨之○賜畫工崔涇安貴生爵初懿敬薨世祖曰其嗣皆幼不可不傳其貌以遺之命涇貴生草圖以藏之及上卽位奉于月山家壬辰奉畫大王王后晬容安
記聞v1德宗在東宮薨逝世祖敎曰修短命也其嗣皆幼不可不傳其貌以遺之命畫師崔涇安貴生圖藏之及成廟卽位命奉安于月山大君家廟賜涇貴生爵言官於經筵論其濫上敎曰予生纔月乃失顧復不意今日得覩
大東彙纂v1天順丁丑德宗在東宮薨逝世祖以爲其嗣皆幼不可不傳其貌以遺之命畫師崔涇安貴生圖而藏之及成廟卽位命奉安于月山大君家廟賜涇貴生爵言官於經筵論其濫上曰予生纔數月乃失顧復不意今日得
宮闕志下影幀三 十三函于璿源殿○成宗二年辛卯命畵工崔涇 安貴生摸寫昭憲王后世祖睿宗御眞奉 安于璿源殿○中宗三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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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