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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무(辛允武)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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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513(중종 8)
시대조선전기
본관영산(靈山)
활동분야무신 > 무신
공신호정국공신(靖國功臣)

[관련정보]

[상세내용]

신윤무(辛允武)
미상∼1513년(중종 8).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영산(靈山).

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군자시부정(軍資寺副正)에 올라 왕의 총애를 받던 중,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의 학정에 불만을 품은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에게 내외정세를 세밀히 알려주어 중종반정을 결심하게 하고, 거사일에는 그가 군사를 모아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신수영(愼守英) 등을 격살하고 일을 성사시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천군(寧川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는데, 탐오하고 군무에 소홀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박원종 등의 구원으로 4개월 만에 다시 서용되었다.

그뒤 공조판서를 거쳐 좌우참찬을 지내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대간들의 탄핵으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때 역시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된 박영문(朴永文)이 울분에 못 이겨 자주 그의 집을 찾아와 조정을 비방하고 난언을 많이 하였다. 그는 늘 박영문에게 시기가 아니라며 타일러서 말렸으나, 이와같은 사실을 엿들은 의정부의 노비 정막개(鄭莫介)의 고변으로 주살되고 두 아들 공(恭)검(儉)은 모두 교살당하였다.

그가 일찍이 박원종 등에게 중종반정을 재촉한 것은, 자신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변란이 나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陰厓集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