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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안(成希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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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우옹(愚翁)
호(號)인재(仁齋)
시호(諡號)충정(忠定)
생년1461(세조 7)
졸년1513(중종 8)
시대조선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성찬(成瓚)
외조부이후(李厚)
공신호병책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策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

[상세내용]

성희안(成希顔)
1461년(세조 7)∼1513년(중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우옹(愚翁), 호는 인재(仁齋).

부친은 돈녕부판관 성찬(成瓚)이며, 모친은 종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李厚)의 딸이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8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이어 부수찬으로 승진하였으며, 당시 성종의 숭유정책(崇儒政策)에 신진으로서 국왕이 많은 자문을 구할 만큼 학문이 깊었다.

그뒤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가 되었다가 관위가 누진되어, 연산군이 즉위하여서도 문무의 요직을 거쳐, 1499년(연산군 5)에는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으로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 이계전(李季全)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503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사은사(謝恩使)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왕세자 책봉에 대한 하례를 하고 돌아왔다.

이어서 형조참판이 되어 가선대부에 올랐고, 1504년에는 이조참판으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고 있었으나, 연산군이 양화도(楊花渡)의 망원정(望遠亭)에서 유락을 즐길 때,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올려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무관의 말단직인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연산군의 폭정은 날로 더하여 민심 또한 더욱 흉흉해지고 있던 1506년, 박원종(朴元宗)과 함께 반정(反正)을 도모하여 명망가이던 유순정(柳順汀)을 참여시키고,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홍경주(洪景舟) 등에게 군대를 동원시켜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옹립, 거사하였다.

반정이 성공하자 거사의 주역으로서 병책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策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1등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다. 관직은 형조판서에서 곧 이조판서를 제수받고 숭록대부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으로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여 반정의 뒤처리를 하였다. 거사에 있어 앞장서서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은 차례가 있다고 하여 박원종유순정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셋째번에 서기도 하였다.

한편, 중종 즉위에 명나라 고명(誥命)이 어렵게 되자, 그가 청승습사(請承襲使)명나라에 가서 일을 성사시키고 돌아왔다. 이어서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이 되어 『연산군일기』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1509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듬해에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병조판서를 겸임하여 군무를 총괄하였다.

그뒤 반정공신의 다수를 이루는 무관을 옹호하여 사풍(士風)을 능멸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좌의정으로 승진하였고, 1513년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