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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수(宋玹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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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정민(正愍)
생년?(미상)
졸년1457(세조 3)
시대조선전기
본관여산(礪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복원(宋復元)

[상세내용]

송현수(宋玹壽)
미상∼1457년(세조 3).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송복원(宋復元)의 아들이며 단종의 장인이다.

1454년(단종 2)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로 있을 때 딸이 단종의 비로 책봉되자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졌고, 곧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제수받았으며 이어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조가 즉위한 뒤 윤대(輪對)때에 상왕의 보필을 당부받기도 하였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대간(臺諫)의 처벌요구가 있었지만 세조의 두둔으로 처벌을 면하였다.

이듬해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게 되자, 의금부에서는 그 역시 단종복위사건에 교통(交通)의 혐의가 있다 하여 모역죄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주장하였고 결국 추국(推鞠)을 받게 되었다.

추국의 결과 장(杖) 100에 영원히 원방의 관노(官奴)에 속하게 하고, 처자 역시 관노비에 충당되었다가 정창손(鄭昌孫) 등의 주장으로 교사(絞死)되고 말았다.

그뒤 아들 송거(宋琚)가 과거를 보려 하자 대간의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성종이 특별히 허락하였고 조카인 영(瑛)도 대간에 임명되는 등 그 일문에 대한 서용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숙종영돈녕부사에 추증되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정조정민(正愍)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참고문헌]

端宗實錄
世祖實錄
肅宗實錄
燃藜室記述
朝鮮名臣錄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