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錦城大君)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4AE08C131B300B1426X0 |
성명 | 이유(李瑜) |
시호(諡號) | 정민(貞愍) |
생년 | 1426(세종 8) |
졸년 | 1457(세조 3)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왕실 > 왕자 |
부 | 이방번(李芳蕃) |
생모 | 소헌왕후(昭憲王后) |
처부 | 최사강(崔士康) |
[상세내용]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년(세종 8)∼1457년(세조 3). 조선 초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瑜).
부친은 세종, 모친은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崔士康)의 딸을 부인으로 삼고, 그해 태조의 일곱째아들인 이방번(李芳蕃)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와 함께 어린 조카에게 사정전(思政殿)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왕의 보필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1455년 그를 비롯한 몇몇 종친과 궁정 안에 있는 왕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무사들과 결탁하여 당여를 부식(扶植)한다는 죄명을 받고,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이어 광주(廣州)에 이배되었다. 그해 수양대군이 단종을 핍박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였다.
이듬해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기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될 때, 삭녕에서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순흥에 안치된 뒤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하여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하기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하여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되는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두 분이 사랑하던 손자이고 아들이며 자신의 조카 되는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할 적에 육종영(六宗英)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충청도 청안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부친은 세종, 모친은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崔士康)의 딸을 부인으로 삼고, 그해 태조의 일곱째아들인 이방번(李芳蕃)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와 함께 어린 조카에게 사정전(思政殿)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왕의 보필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1455년 그를 비롯한 몇몇 종친과 궁정 안에 있는 왕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무사들과 결탁하여 당여를 부식(扶植)한다는 죄명을 받고,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이어 광주(廣州)에 이배되었다. 그해 수양대군이 단종을 핍박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였다.
이듬해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기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될 때, 삭녕에서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순흥에 안치된 뒤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하여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하기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하여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되는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두 분이 사랑하던 손자이고 아들이며 자신의 조카 되는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할 적에 육종영(六宗英)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충청도 청안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莊陵誌
國朝人物考
端宗實錄
世祖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莊陵誌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재호(李載浩)
대표명 | 금성대군(錦城大君) |
명 | 유(瑜) |
봉호 | 금성(錦城), 금성대군(錦城大君), 금성대군유(錦城大君瑜) |
성명 | 이유(李瑜) |
시호 | 정민(貞愍) |
명 : "유(瑜)"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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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