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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효증(閔孝曾)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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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희삼(希參)
시호(諡號)공목(恭穆)
생년?(미상)
졸년1513(중종 8)
시대조선전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오(閔悟)
공신호정국공신(靖國功臣)

[관련정보]

[상세내용]

민효증(閔孝曾)
미상∼1513년(중종 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희삼(希參). 민오(閔悟)의 아들이다.

1476년(성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경연전경(經筵典經), 1479년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를 거쳐 1487년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1489년 장령이 되었다. 다음해 박숭질(朴崇質)간원(諫院) 임용이 불가함을 적극 주장하다가 도리어 해임되고, 1491년 야인을 토벌할 때 서북면 도원수 이극균(李克均)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493년 사간집의를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로 나가서는 선정을 베풀었다.

1497년(연산군 3) 상소문 10개항을 올려 경연의 필요성과 간언을 중히 여길 것, 사(邪)‧정(正)을 밝힐 것, 절검(節儉)에 힘쓰고 애민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1501년 형조참의, 이듬해 공조참판을 거쳐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할 때 함경도내의 사창(社倉)설치로 민폐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1504년 한성부판윤공조판서로 재임중 정조사(正朝使)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춘추관당상을 지냈다.

1506년 지의금부사우참찬에 이르고, 같은해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여평군(驪平君)에 봉하여졌다.

1507년(중종 2)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성품이 강개하고 청백하여 언사가 매우 격하였으며 만년에는 조급하고 관용심이 없었다. 연산군 때에는 선공감제조(繕工監提調)로 있으면서 영선의 일을 많이 벌였고 연산군의 명에 잘 복종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시호는 공목(恭穆)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권인혁(權仁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