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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부(金汝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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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기복(基福)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의성(義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안국(金安國)
외조부임효창(林孝昌)

[상세내용]

김여부(金汝孚)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기복(基福).

부친은 김안국(金安國), 모친은 임효창(林孝昌)의 딸이다.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관직이 전한(典翰)에 이르렀다. 인물이 경박하고 출세에 급급하여 가정의 교훈을 따르지 않아 일찍이 숙부 김정국(金正國)이 우리 형제의 뒤를 이을 만한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였다고 하는데, 이때에 와서 외척 윤원형(尹元衡)에게 붙으니 김정국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평소 김홍도(金弘度)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서로 당을 만들어 다투었다.

1557년(명종 12) 윤원형이 첩을 처로 삼은 사실을 김홍도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더라고 윤원형에게 고자질하여 조정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어 그의 당인 대사간 김백균(金百鈞)사간 조덕원(趙德源)과 함게 탄핵하여 김홍도김규(金虯)를 각각 갑산경원으로 귀양보내고 김계휘(金繼輝)를 삭출시켰다.

뒤에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으로부터 사사로운 원한으로 조정을 어지럽힌다고 탄핵을 받았고 또 이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1574년(선조 7)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서용을 청하여 한때 선조의 허락을 받았으나 삼사(三司)에서 극력 반대하여 끝내 서용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大東野乘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우인수(禹仁秀)
대표명김여부(金汝孚)
여부(汝孚)
성명김여부(金汝孚)
기복(基福)

성명 : "김여부(金汝孚)"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9言之根本也同副承旨李憲國曰當今聖君在上賢相在下故士林無吳若使權奸在朝則此事亦可釀成士林之禍往在丁巳年金汝孚金弘度互相詆毁而弘度常憤尹元衡之以妾爲妻多發於言汝孚告元衡元衡銜之若以弘度此言請罪則明廟必不罪故搆餙
寒臯觀外史v19災金汝孚金鎭李銘林復等禁錮歲久冤氣必積可復叙用以消冤氣上從之扵是三司並發請勿收叙累日乃允金汝孚金鎭李銘則扵丙辰丁巳年間依附尹元衡攻擊金弘度金虬䒭将嫁禍士林者也林刻卒權奸下有将字復則乙巳以後黨附權
寒臯觀外史v19六月大旱命䟽放右議政盧守愼建白以為冤氣召災金汝孚金鎭李銘林復等禁錮歲久冤氣必積可復叙用以消冤氣上從之扵是三司並發請勿收叙累日乃允金汝孚金鎭李銘則扵丙
寒臯觀外史v20浮言之根本也同副承旨李憲國曰當今聖君在上賢相在下故士林無虞若使權奸在朝則此事亦可釀士林之禍徃在丁巳年金汝孚金弘度互相詆毀而弘度常忿尹元衡之以妾為妻多發扵言汝孚以告元衡元衡銜之若以弘度此言請罪則明廟必不罪故構
郯述v04金汝孚
國朝人物志v2郞世愚子癸卯生員丙午文科歷三司銓郞官至典翰與金繼輝金弘度志同道合士流倚重金汝孚附尹元衡欲爲舍人謂虬曰母病將死願爲舍人以濟喪事因涕泣以示急切之狀而歸輒宿於倡
國朝人物志v2芑附於李銘上同李銘字子新孝寧大君補五代孫丙午文科校理以元衡黨見廢同上金汝孚字基福義城人安國子庚子進士己酉文科典翰以元衡黨見廢汝孚從弟繼趙字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