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우(金季愚)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ACC4C6B0D1539X0 |
자(字) | 경안(景顔) |
호(號) | 웅음(雄飲) |
생년 | ?(미상) |
졸년 | 1539(중종 34)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연안(延安)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찬(金巑)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계우(金季愚)
미상∼1539년(중종 3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안(景顔), 호는 웅음(雄飲).
부친은 김찬(金巑)이다.
1504년(연산군 10) 주부로서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판관‧청도군수‧수원부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덕성이 뛰어나 중종이 잠저에 있을 때에는 사부(師傅)로 있었다.
1507년(중종 2) 정과출신자라 하여 참상판관으로 특채되자 대간이 그 부당성을 왕에게 건의한 바 있다.
1512년 청도군수로 있을 때는 왜인을 추국하는 데 너무 심하게 하였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고, 사헌부에서도 파직을 요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벼슬은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죽은 뒤 중종이 애석해하면서 특별히 관곽 각 1부와 석회 30석을 내렸다.
부친은 김찬(金巑)이다.
1504년(연산군 10) 주부로서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판관‧청도군수‧수원부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덕성이 뛰어나 중종이 잠저에 있을 때에는 사부(師傅)로 있었다.
1507년(중종 2) 정과출신자라 하여 참상판관으로 특채되자 대간이 그 부당성을 왕에게 건의한 바 있다.
1512년 청도군수로 있을 때는 왜인을 추국하는 데 너무 심하게 하였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고, 사헌부에서도 파직을 요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벼슬은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죽은 뒤 중종이 애석해하면서 특별히 관곽 각 1부와 석회 30석을 내렸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中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이존희(李存熙)
명 : "계우(季愚)"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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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