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충렬(金忠烈){1}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CDA9B82CB1503X0
자(字)국기(國紀)
생년1503(연산군 9)
졸년1560(명종 15)
시대조선전기
본관강릉(江陵)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종윤(金宗胤)

[상세내용]

김충렬(金忠烈)
1503년(연산군 9)∼1560년(명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국간(國幹), 또는 국기(國紀). 사헌부감찰 김종윤(金宗胤)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민하고 근실하였다.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1년 29세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특별히 서용(敍用)되었다. 곧, 사헌부감찰로 전직, 이듬해 견명사절(遣明使節)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한성부판관경기도사(京畿都事)‧호조‧예조‧형조의 좌랑정랑을 거치고, 외직으로 나가 여산군수보성군수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성균관사예가 되었는데, 이때 중종이 죽어 국장도감(國葬都監)낭관(郞官)을 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명종 때에는 사헌부장령사간원사간을 지내며 관기를 확립하고 민폐의 시정에 힘썼는데, 강직하기로도 유명하였다. 이어서 제주목사가 되어 민정을 주관하였는데, 1552년(명종 7) 연해의 민가를 약탈하고 있던 왜적 1백여인을 사로잡아서 목을 베었다.

그런데 왜적이 아니라 당나라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조정에 전해지면서 직무를 잘못 처리하였다고 평안도의 방산진(方山鎭)에 충군(充軍)되었다.

그러나 1555년 제주의 백성들이 선위사(宣慰使)에게 그가 무고하다고 호소하여 사실이 밝혀지면서 직첩이 환급되고 서반(西班)에 제수되어 오위장(五衛將)을 겸임하였다. 이어서 삭녕군수가 되었으나 곧 죽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