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자임(尹自任)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4C790C784B1488X0 |
자(字) | 중경(仲耕) |
생년 | 1488(성종 19) |
졸년 | 1519(중종 14)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파평(坡平)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윤금손(尹金孫) |

[관련정보]
[상세내용]
윤자임(尹自任)
1488년(성종 19)∼1519년(중종 1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경(仲耕). 파성군(坡城君) 윤금손(尹金孫)의 아들이다.
1513년(중종 8)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고, 이듬해 정자‧저작으로 출발하여, 그뒤 박사‧정언‧부수찬‧교리‧지평‧장령‧집의 등 삼사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18년 사간으로, 난해한 글로 알려진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진강(進講)할 수 있는 26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계(選啓)되었다. 이어 소격서(昭格署)의 혁파에 대하여 정계와 사림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사림을 모함하는 「시간계서(矢幹係書)」에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함께 그의 이름이 열거되기도 하였다.
또, 향약의 보급, 현량과(賢良科)실시, 위훈(僞勳)삭제 등 삼사를 중심으로 한 사림의 입장을 실천시키는 데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519년 의주목사‧직제학‧우부승지를 거쳐 좌승지로 있을 때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온양으로 중도부처되었다가 다시 북청으로 위리안치되었으며 배소에서 죽었다.
그는 『상서(尙書)』 무일편(無逸篇)을 진강하는 등 학식이 뛰어났고, 무예도 겸비하였기 때문에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 등에 의하여 일차적인 제거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538년(중종 33) 기묘사림이 다시 서용되면서 신원되어 직첩이 환급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증직‧증시(贈諡)가 이루어졌다.
1513년(중종 8)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고, 이듬해 정자‧저작으로 출발하여, 그뒤 박사‧정언‧부수찬‧교리‧지평‧장령‧집의 등 삼사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18년 사간으로, 난해한 글로 알려진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진강(進講)할 수 있는 26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계(選啓)되었다. 이어 소격서(昭格署)의 혁파에 대하여 정계와 사림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사림을 모함하는 「시간계서(矢幹係書)」에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함께 그의 이름이 열거되기도 하였다.
또, 향약의 보급, 현량과(賢良科)실시, 위훈(僞勳)삭제 등 삼사를 중심으로 한 사림의 입장을 실천시키는 데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519년 의주목사‧직제학‧우부승지를 거쳐 좌승지로 있을 때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온양으로 중도부처되었다가 다시 북청으로 위리안치되었으며 배소에서 죽었다.
그는 『상서(尙書)』 무일편(無逸篇)을 진강하는 등 학식이 뛰어났고, 무예도 겸비하였기 때문에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 등에 의하여 일차적인 제거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538년(중종 33) 기묘사림이 다시 서용되면서 신원되어 직첩이 환급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증직‧증시(贈諡)가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大東野乘
英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大東野乘
[집필자]
이범직(李範稷)
명 : "자임(自任)"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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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