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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처성(安處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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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지(誠之)
호(號)죽계(竹溪)
생년1477(성종 8)
졸년1517(중종 12)
시대조선전기
본관순흥(順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안침(安琛)

[상세내용]

안처성(安處誠)
1477년(성종 8)∼1517년(중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성지(誠之), 호는 죽계(竹溪). 판서 안침(安琛)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지었는데 성종은 일찍이 그가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장한가(長恨歌)」를 착오없이 암송하는 것을 시험하고 그의 글 재주에 놀랐을 정도였다.

1495년(연산군 1) 진사가 되고, 150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1506년(중종 1)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부교리가 되었다.

1509년 지평(持平)을 거쳐 같은해 시독관(侍讀官)으로 경연에 참석하였다.

이때 왕실의 대비전에서는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대자사(大慈寺)를 수리하도록 하였으나 홍문관을 비롯한 시독관 이자화(李自華), 지사(知事) 신용개(申用漑) 등과 함께 수차에 걸쳐 대자사 중수를 반대하는 소를 올려 백성들의 노역을 줄이고 이단을 배척하는 데 앞장섰다.

1511년 장령으로 대간에 재직할 때 공론(公論)을 저지, 억제한 일로 인하여 탄핵을 받아 1513년 다시 홍문관응교를 제수받았다.

그뒤 전라충청도암행어사가 되고, 1515년 선공감정(繕工監正)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다. 대간에서는 그와 안지(安智)문제로 수차 탄핵소를 올렸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는데 이때 사신(史臣)이 그의 품성을 논하기를 “본래 정직하지 못하여 남이 옳다는 것은 그르다 하고 남이 나쁘다는 것도 좋다고 하였다.

소박하고 우직하여 꾸밈이 없이 나라일에 마음을 다하였으나 이극돈(李克墩) 같은 자의 죄를 벗겨주려고 노기까지 띠면서 동렬(同列)을 비방하였다.”고 하였다.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淸選考

[집필자]

조병로(趙炳魯)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