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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언충(洪彦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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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직경(直頃)
호(號)우암(寓菴)
생년1473(성종 4)
졸년1508(중종 3)
시대조선전기
본관부계(缶溪)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귀달(洪貴達)
외조부김숙정(金淑正)
저서『자만사(自挽辭)』

[상세내용]

홍언충(洪彦忠)
1473년(성종 4)∼1508년(중종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직경(直頃), 호는 우암(寓菴).

부친은 참찬 홍귀달(洪貴達)이며, 모친은 김숙정(金淑正)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또다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이어 정자저작박사를 역임하였다.

1498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질정관(質正官)부수찬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어 1503년 수찬으로 복직하여 교리가 되고, 그해에 정조사(正朝使)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다시 진안에 유배되었다. 이어 아버지 홍귀달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또다시 해도(海島)로 이배되었다. 그가 유배의 명을 받았을 때 집안사람들이 몸을 피할 것을 권하였으나 왕명을 어길 수 없다 하여 조용히 길을 떠났다.

해도에 이배 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중종이 불러 직강(直講)을 제수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다. 그는 천성이 단솔(担率)하고 재기가 있어 어릴 때에 이미 학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썼다. 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다.

상주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만사(自挽辭)』가 있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