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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상(曺繼商)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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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종성(宗聖)
시호(諡號)충정(忠貞)
생년1466(세조 12)
졸년1543(중종 38)
시대조선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구서(曺九敍)
조부조상치(曺尙治)
공신호정국공신(靖國功臣)

[상세내용]

조계상(曺繼商)
1466년(세조 12)∼1543년(중종 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종성(宗聖).

부제학 조상치(曺尙治)의 증손으로, 부사 조구서(曺九敍)의 아들이다.

1495년(연산군 1) 진사가 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를 지내고 승진하여 1502년 부교리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의 처족인 신승복(愼承福)의 승자와 경주부사 임명에 반대하다가 의금부에 수금되고 이어 파직되었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중종반정을 도모하자, 여기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창녕군(昌寧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홍문관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이 죽자 각방당상(各房堂上)으로서 『연산군일기』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8년(중종 3) 대사헌이 되고, 이어 성절사(聖節使)명나라에 다녀와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510년 다시 대사헌이 되고 공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세번째로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좌윤을 거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때 명나라에서 제주도 표류민을 쇄환하여 왔는데, 이 일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4년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뒤에 예조호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된 뒤 다시 기용되어 우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성명 : "조계상(曺繼商)"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6嗣王未得輕擧此事恐以此也李蓀金應箕辛允武尹金孫鄭光世任由謙沈貞李長生議同申用漑姜渾張順孫金詮朴說姜澂曺繼商柳聃年孫㴻成世純議魯山初生而昭陵卽薨逝魯山末年之事昭陵所不知當時大臣以弟自愼之故建請廢陵而從之恐非出
記聞v1主之者不然也申用漑崔淑生力主其議安瑭豈有爲其子而設此科乎其後用漑亦悔之語臣曰我之初計誤矣張順孫曺繼商大憲李沆修撰李芄皆以爲當罷不罷上初命勿罷只勿敍顯職竟罷之
國朝捷錄v01三人孝誠雲水君德川君子恭靖大王孫沈㥧邊修原川君武參判崔漢洪窵鶴林君六道兵使武知中尹衡老鈴陽君右尹怛子曺繼商昌寧君崇政柳洵文城君見上文僖公金勘具壽永昏朝小人趙靜庵請削勳靖國功臣金壽童永嘉君文敬公見上金勘延昌君
郯述v03曺繼商
東國續修文獻錄v1君恭靖大王孫德川君子沈順經靑城君右尹胡襄公邊脩原川君武崔漢洪鷄林君六道兵使知中尹衡老鈴陽君右尹怛子曺繼商昌寧君崇政柳洵文城府院君文僖公金壽童永嘉君見上相金勘延昌府院君贊成李誡世宗孫雪山君李季男平昌君蔭吏
二十一功臣會盟錄n1책嫡長孫臣禹天與 靖國功臣卞雋嫡長孫臣卞憲 靖國功臣曺繼商嫡長孫臣曺允濟 靖社功臣李義培嫡長孫臣李思胤 宣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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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