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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민수(權敏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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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숙달(叔達)
호(號)퇴재(退齋)
생년1466(세조 12)
졸년1517(중종 12)
시대조선전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권임(權琳)

[상세내용]

권민수(權敏手)
1466년(세조 12)∼1517년(중종 12). 조선 연산군중종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달(叔達), 호는 퇴재(退齋).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권임(權琳)의 아들이다.

1494년(성종 25)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1495년(연산군 1) 홍문관정자에 기용되어 저작박사를 거쳐 부수찬을 역임하고, 이어 사간원정언병조좌랑에 보임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이조좌랑으로 직언을 하다가 영외(嶺外)에 유배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소격서영(昭格署令)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 거쳤고, 1509년(중종 4) 사헌부집의로 있을 때 부경사신(赴京使臣)들이 은을 국내에 반입하는 폐단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그뒤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왜인추고경차관(倭人推考敬差官)으로 활약하였으며, 홍문관부제학이 되어서는 군정을 엄히 할 것,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 기강을 바로 세울 것 등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동부승지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대사간대사헌을 역임하고, 1516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겉으로는 관후한 인물 같으나, 실제로는 음교(陰狡)하고 중상을 일삼으며, 탐비(貪鄙)하다는 사신(史臣)의 평을 받았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大東野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명 : "민수(敏手)"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5梅臣及梅臣之子元麟元猉元麟之子孝成俱以孝行旌其閭凡四世而旌表者六古未嘗有也○權達手字通之號桐溪少與兄敏手居憂廬于谷墓山一日自理安村舍步往廬次憩于退板峴名盤石上時方暮秋黃雲遍野敏手指點曰自某畦至某畦收入吾家
國朝編年v06曰三勳靖國之功雖大䝱廢中闈之罪萬世難逃若起三勳於九原示此疏而問之則必縮頸慙恧之不暇臺諫皆無識者只信荇敏手之言靡然從之惜哉
記聞v3臣曰三勳推戴之功雖大䝱廢中闈之罪萬世難逃若起三勳於九原示此疏而問之亦必縮頸慙而之不暇臺諫皆無識者只信敏手荇之言靡然從之惜哉
寒臯觀外史v10詮字仲倫號懶軒延安人官領相謚忠貞敏手字叔達號退齋安東人官大憲
寒臯觀外史v11士龍號湖陰東萊人官判樞敏手字叔達號退齋安東人官大憲○湖陰游楓岳詩曰萬二千峯領畧䢜紛紛黃葉打征衣正陽寒雨燒香夜蘧瑗方知四十非桃花
寒臯觀外史v11鄭雲鄕士龍甞奉使嶺南愛昌原妓相别到驛亭吟一絶書柱間隱微處曰㫁盡愁腸無一寸檜山情刀太夫銛權觀察敏手亦奉使徃嶺南繼踵至驛亭適見柱間所書墨猶未漧認知為鄭書䢜卽見雲鄕曰詩䝿於哀而不傷檜山詩句無乃近於傷 J
大事編年v4上命遞長坤安國直提學金安老發兩是之論駁遞溥等而曰光祖爲言路扶植敏手荇爲宗社請罪俱未爲非云云時議以爲荇敏手深嫉趙光祖安老兩是皆得罪萬世公論云
大事編年v4餘事長坤反復曉諭猶不得相容詣闕各陳所懷上命遞長坤安國直提學金安老發兩是之論駁遞溥等而曰光祖爲言路扶植敏手荇爲宗社請罪俱未爲非云云時議以爲荇敏手深嫉趙光祖安老兩是皆得罪萬世公論云
國朝人物志v1字叔達安東人父主簿琳娶判書延安李補丁女生敏手及達手俱有雋才以文選之學爲諸生倡成宗甲寅生員文科副提學燕山甲子獄起弟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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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