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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숭조(柳崇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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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종효(宗孝)
호(號)진일재(眞一齋)
시호(諡號)문목(文穆)
생년1452(문종 2)
졸년1512(중종 7)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지성(柳之盛)
저서『칠서언해』
저서『진일재문집』
저서『대학잠(大學箴)』

[상세내용]

유숭조(柳崇祖)
1452년(문종 2)∼1512년(중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종효(宗孝), 호는 진일재(眞一齋). 서령 유지성(柳之盛)의 아들이다.

세조 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에 발탁되고, 사유록(師儒錄)에 들었다. 그뒤 사간원정언홍문관부교리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면서 정부관원들의 기강확립과 국왕에 대한 간쟁에 힘썼다.

1504년(연산군 10) 국왕의 어지러운 정치를 직간하다가 미움을 사서 원주로 유배되었다.

그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고, 이와 함께 네 자급(資級)을 뛰어 판결사에 등용되었고, 공조참의로 전직되어 삼공(三公)들의 주청으로 경연관을 겸임하였다.

곧이어 성균관대사성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성리학의 학통을 새롭게 젊은 문신들에게 전수하였고,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장(師長)의 자리를 그가 아니면 지킬 사람이 없다는 삼공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재임되었다. 그는 18년 동안의 벼슬길을 거의 성균관에서 보내면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유림을 다수 배출시켰으며, 성리학의 학풍을 크게 북돋우었다. 『서경』『역경』『예기』에 밝았고, 특히 천문‧역상(曆象)에 통달하여 그 자신이 손수 혼천의를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남긴 『칠서언해』는 언해의 효시로 후학들에게 큰 공적을 남겼다. 벼슬길에서 그가 보인 강직함과,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언간의 올바른 정신은 후학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진일재문집』 4권, 『대학잠(大學箴)』 1권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