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왕후(貞熹王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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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 | 자성(慈聖) |
이명(異名) | 흠인경덕선열명순휘의(欽仁景德宣烈明順徽懿) |
이명(異名) | 원숙신혜신언(元淑愼惠神憲) |
생년 | 1418(태종 18) |
졸년 | 1483(성종 14)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파평(坡平) |
활동분야 | 왕실 > 비빈 |
부 | 윤번(尹璠) |
묘소 | 양주 |
[상세내용]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년(태종 18)∼1483년(성종 14). 조선 제7대왕 세조의 비(妃). 본관은 파평(坡平).
판중추부사 증영의정 윤번(尹璠)의 딸이다.
1418년(태종 18) 홍주 군아(郡衙)에서 태어나 1428년(세종 10) 가례를 행하였으며, 처음에는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수봉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김종서(金宗瑞) 등의 제거를 위한 거사 때 용병(用兵)이 누설되어 손석손(孫碩孫) 등의 만류가 있었으나, 대군이 중문에 이르자 정희왕후가 갑옷을 들어 입혀서 용병을 결행하게 하였다.
1455년(세조 1) 왕비에 책봉되었고, 1457년 존호를 자성(慈聖)이라 하였으며, 1469년(예종 1) 흠인경덕선열명순휘의(欽仁景德宣烈明順徽懿)의 존호를 더하였다.
또 1471년(성종 2) 원숙신혜신헌(元淑愼惠神憲)을 가상하였다. 예종이 14세로 즉위하자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처음이다. 예종이 재위 1년2개월 만에 죽자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德宗: 예종의 형)의 둘째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 뒤의 성종)이 즉일로 즉위하였다.
이는 조종조(祖宗朝)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어렸고, 또 성종에게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있었는데도 즉일로 즉위하게 한 것은 정희왕후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성종 또한 13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7년 동안이나 섭정을 계속하였다.
1483년 3월 30일 온양에 있다가 행궁에서 죽으니 수가 66세였다. 덕종‧예종과 의숙공주(懿淑公主) 등 2남1녀를 두었다.
능은 양주에 있는 광릉(光陵: 세조의 능에서 동편 언덕 丑坐)이며, 6월 12일에 장사하였다.
판중추부사 증영의정 윤번(尹璠)의 딸이다.
1418년(태종 18) 홍주 군아(郡衙)에서 태어나 1428년(세종 10) 가례를 행하였으며, 처음에는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수봉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김종서(金宗瑞) 등의 제거를 위한 거사 때 용병(用兵)이 누설되어 손석손(孫碩孫) 등의 만류가 있었으나, 대군이 중문에 이르자 정희왕후가 갑옷을 들어 입혀서 용병을 결행하게 하였다.
1455년(세조 1) 왕비에 책봉되었고, 1457년 존호를 자성(慈聖)이라 하였으며, 1469년(예종 1) 흠인경덕선열명순휘의(欽仁景德宣烈明順徽懿)의 존호를 더하였다.
또 1471년(성종 2) 원숙신혜신헌(元淑愼惠神憲)을 가상하였다. 예종이 14세로 즉위하자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처음이다. 예종이 재위 1년2개월 만에 죽자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德宗: 예종의 형)의 둘째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 뒤의 성종)이 즉일로 즉위하였다.
이는 조종조(祖宗朝)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어렸고, 또 성종에게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있었는데도 즉일로 즉위하게 한 것은 정희왕후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성종 또한 13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7년 동안이나 섭정을 계속하였다.
1483년 3월 30일 온양에 있다가 행궁에서 죽으니 수가 66세였다. 덕종‧예종과 의숙공주(懿淑公主) 등 2남1녀를 두었다.
능은 양주에 있는 광릉(光陵: 세조의 능에서 동편 언덕 丑坐)이며, 6월 12일에 장사하였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璿源系譜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睿宗實錄
成宗實錄
璿源系譜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집필자]
이종호(李棕浩)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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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